항목 ID | GC0500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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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出宰抱川作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48년 - 「출재포천작」 저자 유득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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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07년 - 「출재포천작」 저자 유득공 사망 |
성격 | 한시 |
작가 | 유득공 |
[정의]
1784년~1785년 사이에 유득공이 포천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지은 고금체시 형태의 한시.
[개설]
「출재포천작(出宰抱川作)」은 1784년(정조 8)부터 1785년(정조 9) 사이에 조선 후기의 문신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이 포천 현감으로 재직할 때에 지은 고금체시(古今體詩) 형태의 한시이다.
유득공은 자(字)를 혜보(惠甫), 혜풍(惠風)이라 했고, 호(號)는 영재·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가상루(歌商樓)·은휘당(恩暉堂) 등을 사용하였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 박제가(朴齊家)[1750~1805], 이덕무(李德懋)[1741~1793]와 교유하였고, 사검서관(四檢書官) 중의 한 사람이었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하고, 1784년(정조 8) 포천 현감이 되고, 「발해고」를 짓기도 하였다.
『영재집(泠齋集)』은 저자가 자신의 시문을 편차하여 등사한 자편고(自編稿)이다. 20대 후반부터 이미 자신의 글을 모아 편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량은 15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조유문원리(早游文苑裏)[일찍이 문단(文壇)에서 노닐다가]
유피명주은(謬被明主恩)[과분하게도 어진 임금의 성은(聖恩)을 입어]
분부이적현(分符莅赤縣)[적현(赤縣)의 현감에 봉직되었네.]
비개과청문(飛葢過靑門)[수레를 타고 동대문을 지날 적에]
의의련성궐(依依戀城闕)[궁궐이 하염없이 그리웠네.]
역역람천원(歷歷覽川原)[보이는 산천은 역력하지만]
천원일이형(川原一以逈)[산천은 아득히 멀어지고]
도어식차분(徒御息且奔)[마부는 쉬었다 달리기를 계속했네.]
염자민사중(念玆民社重)[백성과 사직(社稷)의 중함을 명심하나]
질피사송번(疾彼詞訟繁)[저 많은 송사와 문서에 피곤해지네.]
계도귀일할(雞刀貴一割)[계도(雞刀)도 한 번은 사용할 수 있으니]
난극경하언(鸞棘更何言)[난극(鸞棘)은 말해 무엇 하리오.]
* 청문(靑門): 동대문
* 계도(雞刀):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殺鷄用牛刀]는 말로 뛰어난 인재가 낮은 직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다.
* 난극(鸞棘): 탱자나무나 가시나무처럼 좋지 않은 나무는 봉새나 난새와 같은 영조(靈鳥)가 깃들이지 않는 것처럼, 낮고 천한 지위는 뛰어난 인재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말한다[『後漢書』 卷76 循吏傳 仇覽].
[특징]
「출재포천작」은 흔히 볼 수 없는 고금체시로 장편이다. 임금의 성은을 입어 포천 현감에 재직하게 됨을 감사하고, 정성을 다하여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의의와 평가]
「출재포천작」은 작자가 포천 현감으로 재직할 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득공은 흔히 서얼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유삼익(柳三益)이 서자였기 때문이다. 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徐理修)[1749~1802]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사검서라고 일컬어졌다. 유득공은 특히 시에 뛰어났는데, 이덕무는 평하기를 “영재의 시는 근세의 절품이고, 특히 회고시와 기행시가 유명하다.”고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