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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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抱川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00년 - 「포천」 저자 오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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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40년 - 「포천」 저자 오원 사망 |
성격 | 한시 |
작가 | 오원 |
[정의]
1722년~1723년 사이 오원이 포천을 지나면서 지은 오언 율시의 한시.
[개설]
「포천(抱川)」은 1722년(경종 2)부터 1723년(경종 3) 사이에 월곡(月谷) 오원(吳瑗)[1700~1740]이 늦가을 새벽녘에 포천을 지나면서 진퇴격(進退格)[두 개의 서로 비슷한 운부(韻部)를 가지고 한 구씩 건너뛰어 번갈아 운자를 놓는 방식]으로 지은 한시이다.
오원의 자(字)는 백옥(伯玉), 호(號)는 월곡, 관물거사(觀物居士) 등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이재(李縡)[1680~1746]의 문인이다. 남유용(南有容)[1698~1773], 황경원(黃景源)[1709~1787] 등과 교유했다. 1715년(숙종 41) 2월,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 대사성, 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포천」은 오원의 문집인 『월곡집(月谷集)』 권(卷) 1에 실려 전하는 작품이다. 『월곡집』은 오원이 죽은 뒤 아들 오재순(吳載純) 등이 자편 시고 등을 바탕으로 유문을 수집, 편차하여 1752년 14권 7책을 간행한 것이다.
[내용]
신과포천현(晨過抱川縣)[새벽녘 포천현을 지나는데]
한침유자의(寒侵遊子衣)[한기가 나그네의 옷 속에 스미네.]
엄상련야백(嚴霜連野白)[차디찬 서리가 넓은 들판을 하얗게 수놓고]
냉일상산지(冷日上山遲)[서늘한 태양은 산 너머로 더디게 떠오르네.]
축려관홍규(逐侶關鴻叫)[짝을 찾는 관홍(關鴻)의 울음에]
경인수학비(驚人水鶴飛)[사람도 놀라고 백로도 날아오르네.]
고풍취락목(高風吹落木)[높새바람 불어 나뭇잎이 떨어지니]
아사역처기(我思亦凄其)[나의 마음도 그처럼 처연해지네.]
* 진퇴격: 일종의 율시 격식으로 진퇴운(進退韻)이라고도 한다. 한 수의 시에 두 개의 서로 비슷한 운부인 운자(韻字)를 가지고 격구(隔句)로 압운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특징]
「포천」은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포천을 유람하면서 느낀 나그네의 심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서리가 내린 늦가을의 새벽녘에 포천을 지나면서 처연한 심정을 노래했다. 오원은 21세에 춘천의 곡운으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을 찾아뵙고 「곡운행기(谷雲行記)」를 남겼으며, 1723(경종 3)에 영평 백운산을 유람하고 「영협일기(永峽日記)」를 남기기도 했다. 포천은 그의 외가가 있던 곳인데, 이로 보아 「포천」도 「영협일기」를 지을 즈음인 젊은 나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오원은 노론 출신으로 숙종조 인현 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 중 죽은 오두인(吳斗寅)[1624~1689]의 손자이고,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외손이자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손녀사위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뛰어난 문재로 일찍부터 부제학, 대사성, 문형 등에 등용되었지만 노론 준론(峻論)의 의리에 충실했던 오원은 영조 초기의 탕평 정국에 반대하여 사직과 출사를 반복하며 산수를 유람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오원은 자신의 시문을 자주 정리해 두어 젊은 나이에 죽었음에도 비교적 많은 유문을 남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