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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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손산문 |
[정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경동노회에 소속된 교회
[개설]
자천교회(慈川敎會)는 대한제국 말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역사성 있는 교회이다.
특히 남녀석을 구분한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은 교회사뿐만 아니라 건축사·문화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어 현재 총회사적지 제2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교회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지역 마을 속에 자리하여 향토민들과 삶을 함께하였으므로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는 데에도 상당한 의의가 있는 교회이다.
[위치]
자천교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3리 773번지에 있다. 영천시에서 북쪽 청송 방면으로 약 20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화북면(華北面)은, 과거에는 신촌면(新村面)이라 불렸으며, 현재 면 소재지인 자천리(慈川里)를 비롯하여 입석리·상송리·정각리 등 13 개 리(里)로 이루어져 있다.
자천교회가 위치한 자천리는 태백산맥의 준봉인 보현산(普賢山)[1,124m]을 끼고, 이로부터 발원한 횡계천(橫溪川)과 고현천(古縣川)이 마을에서 합류하여 흐르고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
‘자천’이란 지명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앞내를 자을천(慈乙川)이라 하여 ‘잘내’ 또는 ‘자을천’이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을(乙)’ 자를 빼고 자천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자천교회 주변은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천연기념물 제404호인 오리장림(五里長林)[일명 자천숲, 천연기념물 제404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인 옥간정(玉磵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인 모고헌(慕古軒) 등의 문화재와 천문대가 있는 보현산이 모두 자천교회에 인접해 있다.
특히 영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보현산은 천문과학관이 개설되어 있어 천문 관측 체험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별빛 문화 축제, 하늘길 탐방, 농촌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자천교회를 찾는 많은 방문객들이 더불어 찾아보는 곳이기도 하다.
[연원/역사적 관련사항]
자천교회의 연원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아담스(J. E. Adams)[안의와] 선교사와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했던 권헌중[1865~1925, 1915년 영수시무, 1922년 장로장립] 장로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1897년(고종 34) 베어드(Willam. M. Baird)[배위량] 선교사의 뒤를 이어 대구·경북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된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후, 1898년 영천·청송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하게 된다.
한편, 당시 권헌중은 의병 활동을 하였던 전력 때문에 일본인들을 피해 여기저기로 이사하며 전전하다가 청송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후 대구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식솔들을 데리고 청송과 영천의 경계가 되는 노귀재를 넘던 중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은 대구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지금의 화북면 자천리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관으로 완고했던 시골 마을에서는 “우리 마을에 야소교(耶蘇敎)가 웬 말이냐”라고 하며, 서양 종교인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에 권헌중은 당시 마을이 꽤 번성하여 주재소와 면 사무소가 있음에도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음을 간파하고 “내가 마을에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 줄 테니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제의하였다.
결국 마을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은 권헌중은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하여 서당을 겸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자천교회 역사의 첫 출발이 된다. 이후 교회가 조금씩 번성하게 되자 권헌중은 좀 더 큰 예배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사재(私財)를 들여 1904년에 현재의 열여섯 칸 목조 와가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오늘날 자천교회는 교회 역사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당회록」과 「제직회록」을 6·25 전쟁과 교회 분규 과정에서 분실하여 내부 기록에 의한 정확한 설립 연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와 『경북교회사』 등 외부 교회사 문헌에는, 자천교회 설립 연도를 1909년 또는 191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상부 기관에서 선교사를 설립 주체로 작성한 기록이어서 실제 설립 연도와는 상당한 오차가 있다. 이런 가운데 현재 자천교회가 공식적인 설립 연도를 1903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초가삼간 한 채에서 시작된 자생적인 예배 모임이 1904년 예배당 건축[면사무소 건축물 대장에 기록됨]을 기점으로 적어도 1년 전에는 교회가 어느 정도 조직된 모습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 교회 또는 예배 모임 형태로서의 교회의 시작은 권헌중 장로가 복음을 받아들인 1898년경으로 추정된다.
[변천]
1. 신성학교 설립
이렇게 시작된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축 이후 마을에서 본격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해 나갔다. 서당 훈장으로서 의병 활동을 하였던 권헌중은 민족의식을 가진 선각자였다. 따라서 그에게 기독교는 일제에 의해 무너진 나라의 앞날을 의지할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복음과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놓아주고 영혼 구원이라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교회의 대 사회적인 역할을 함께 펼쳐 나갔다. 권헌중의 교회를 통한 이러한 역할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교육자였던 권헌중은 암울한 민족의 미래를 밝혀 나가기 위해 우선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구식인 서당 교육을 벗어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권헌중은 당시 선교사들이 실시하였던 근대식 학교 교육 제도를 도입하여, 자천교회 예배당에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학교의 시작을 1913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상부 기관에 보고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좀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교가 갖는 의미는 주일학교[Sunday School]가 아닌 교회학교[Church School]로서 당시 우리 사회에 근대식 학교가 드물었을 때 교회가 근대식 공교육의 현장을 감당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교회학교는 자천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육 선교에 힘을 쏟았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초기 한국교회가 가진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 당시 신성학교의 여러 교육의 면면들을 보면 일제 치하에서 한국교회가 민족 실력 양성을 도모하기 위해 실시했던 문맹 퇴치 운동, 농촌 계몽 운동, 절제 운동, 민족운동 등이 자천교회와 같은 마을 교회를 통해서 시골 구석구석까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수난 시대
일제에 의한 나라의 수난은 곧 한국교회 전체의 수난이 되었다. 자천교회 또한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수난의 과정이 있었다.
일제는 예배당에 일본 왕의 위패를 두게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이전에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부르게 하는 등 일본 왕을 숭배하는 의식을 먼저 하고, 그 이후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였으니, 교회 예배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는 점점 침체되어 가고 권헌중 장로 또한 1925년에 별세하여 교회의 앞날은 더욱 암담해져 갔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교회는 나름대로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바로 도회지에서 전입해 온 양재황·이복조 부부의 헌신 때문이었다. 남편 양재황 집사는 서울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영천군 신녕금융조합 자천지소에 취업하였고,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아내 이복조 집사는 자천초등학교 강사로 근무하였다. 자천에 머문 약 2년 여간 이들은 자천교회 주일학교 교사로서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성경과 한글을 가르쳤으며, 특히 이복조 집사는 교회 풍금을 반주하면서 아동들과 전 교인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당시 교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크게 불렀던지 교회 밖에까지 울려 퍼졌다. 이 찬송은 민족 운동가이며 무궁화를 재배하여 전국에 배포했던 남궁억(南宮檍)이 가사를 지었다.
1935년 어느 날 양재황 집사는 일본 주재소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다. 당시 순사부장인 다카야마는 호주머니에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찬송가 가사가 적힌 종이 쪽지를 내보이면서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 찬송가는 독립군들이 부르는 불온한 노래라고 인정하면서 찬송 부르기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양재황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라는 가사는 독립운동을 하러 가자는 의미가 아니고, 삼천리강산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예수교를 전하러 가자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다카야마는 조선총독부에 이를 보고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교회 찬송가 전부를 검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년 후 총독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하여금 전국 교회에 공문을 보내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만왕의 왕」 등을 금지곡으로 정하고, 찬송가에 표를 하여 부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금지곡이 된 이유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 주신 동산’이 아니고 ‘천황이 주신 동산’이어야 하고, 「만 왕의 왕」은 ‘예수’가 아니고 ‘천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곡 전체가 금지된 곡이 10여 곡이었고 부분적으로 금지된 곡까지 하면 약 20여 곡이 금지되어 1945년 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1940년대에 들어 일제는 태평양 전쟁에 광분하여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자 전국에 걸쳐 잔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당시에 한국교회의 귀중한 종들이 대부분 공출 당하였고, 심지어 교회의 철제 대문까지도 빼앗겼다.
자천교회 또한 이 수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는 자천교회 예배당에 가마니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어 교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 종까지도 약탈해 갔다. 한 성도[장인동 집사]의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마련된 종이 일제에 의해 수탈되고 말았으니, 이는 교인들의 아픔을 넘어 온 마을의 아픔이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종들이 그렇지만, 자천교회의 종 또한 교회만의 종이 아니라 온 마을에 시간을 알리고 길흉사를 전하는 마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3. 해방과 함께 찾아온 또 다른 수난
1945년 8월 15일, 국권을 회복한 기쁨은 온 나라에 가득하였다. 일제의 핍박으로 무너진 한국교회도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자천교회 또한 교회 재건에 힘을 써 다시 한 번 부흥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이때를 즈음하여 교인들의 수가 증가하여 약 3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이게 되자, 예배 공간의 부족으로 예배당의 원형이 다소 변형되었다. 예배당 외부의 일부를 슬레이트 지붕으로 확장하여 공간을 넓히고 출입문의 방향을 바꾸었으며, 남녀 출입문이 있었던 좌·우 벽 쪽은 원래의 출입문을 없애고 유리 창문을 설치하였다.
또 예배당 내부의 온돌방과 남녀를 구분한 칸막이도 철거하여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해방 공간에서 자천교회는 부흥의 기틀을 새롭게 마련하여 마을의 중심에서, 마을과 함께 국가 재건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 가운데 가졌던 앞날의 소망은 잠시 뿐,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다시 온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다. 특히 1946년 10월에 일어난 대구 10·1 사건은 대구·경북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군정하의 남한 전역에 몰아쳤던, 해방 후 최초의 동족상잔의 아픔이었다.
이로 인하여 자천리 마을에도 좌익 가담자들이 준동하여 우익 인사들에게 해를 가하였고, 이 와중에 자천교회 또한 부속 건물이 전소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좌와 우의 대립은 조용하고 평화롭던 시골 마을조차도 갈등과 반목의 골을 깊게 하더니, 결국 온 나라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게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북면 일대는 북한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북한군에게 기독교인은 미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오인되어, 더러는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자천교회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예배당은 폐쇄되어 북한군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이런 와중에 교회의 중요 문서들을 분실하였고,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권오진 장로[설립자 권헌중 장로의 아들로서 3대 장로를 역임] 같은 이는 수차례 북한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켜 냈다. 이러한 교인들로 인해 자천교회는 전란 가운데서도 예배당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바, 북한군에 대한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교인들이 예배당 지붕에 하얀 횟가루로 ‘CHURCH’라고 표시하여 지혜롭게 예배당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4. 전후(戰後) 자천교회 부흥과 산업화 이후 농촌 교회의 침체
휴전이 선포되고 온 나라가 전후 복구에 진력을 다할 때, 교회도 힘을 더하여야 했다. 자천교회 또한 전란으로 피폐해진 교회와 마을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흩어진 교인들은 다시 힘을 모아 교회를 회복시켜 나감과 동시에 지역을 위한 일도 감당하였다. 선교사들의 지원과 모인 성미(誠米)[쌀로 드리는 헌금]로 가난한 교인들과 지역민들에게 구제 사업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일학교의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그 이유는 전후에 먹고사는 일이 절박하여 가정마다 자녀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그 대안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지역 아동들의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50~1960년대 자천교회 주일학교에서 가진 여름성경학교에는 120여 명의 아동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1960~1970년대에 이르러 자천교회는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부흥기를 맞이하였으며, 많은 교인들의 헌신을 통하여 성장해 갔다. 제직회가 활발하게 활동하여 자천교회가와 주일학교 응원가 등이 제정되고, 새로운 예배당 건축을 위한 기금 조성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즈음에 교인들 간에 갈등이 발생하여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많은 교인들이 이웃에 새 교회를 개척하여 떠났고, 소수만이 교회에 남았다.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만약 이때 교인들이 조성한 건축 헌금으로 새 예배당을 건축하였다면 오늘날 유일한 겹집 구조의 ‘ㅡ’자형 한옥 예배당은 그저 과거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였을 것이다.
교인들의 분열로 자천교회는 침체기에 들었다. 더구나 1970~1980년대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산업화와 도시화에 접어들면서 이농 현상이 일어나자 농촌 교회들은 전반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했다. 지난 시절 격동과 고난의 세월을 겪어 오면서도 마을의 중심에서 나름대로 번성을 이루어 왔던 자천교회도 이러한 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더 이상 과거의 부흥을 회복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자천교회는 오랫동안 어려운 농촌 교회로서 그 명맥만을 근근히 유지하였다.
5. 문화재 교회로서 새로운 전환과 도약
초라한 농촌 교회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었던 자천교회는 2000년대에 들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동안 그 가치도 모른 채 우여곡절 끝에 보존하고 있었던 낡고 초라한 예배당이 정부로부터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2003년도에 관계 기관의 조사·감정 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을 받고, 이어서 2005년도에 영천시와 경상북도의 지원금 약 3억 원의 사업비로 예배당과 종탑 복원 공사, 그리고 화장실을 비롯한 주변 정비 사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다 무너져 가는 예배당을 단지 복원하고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는 차원이었다.
그러다가 2007년도에 교회 옆, 100년이 넘은 고택(古宅)의 주인인 고(故) 김경환 선생이 교회에 자신의 집을 기증해 주었다. 그의 부친은 영천의 3대 부자 중의 한 사람인 김영대 선생으로, 후한 인품과 높은 학식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 고택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집이었다. 원래 이 집은 권헌중 장로의 소유였으나, 일제 치하 어려운 시대에 교회를 섬기는 과정에서 가세가 많이 기울어 김경환의 선대에 빚 대신으로 넘겨주었다.
당시에는 ‘ㄷ’자 가옥이었으나 김영대 씨의 윗대에서 인수하여 ‘ㅁ’자 가옥으로 증·개축하여 근대 개화기의 전형적인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600여 평의 대지 위에 안채와 사랑채, 좌·우 별채, 대문채 등으로 구성된 목조와가이다.
2008년도에 자천교회는 기증받은 집과 대지를 정비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즉 고택을 ‘신성학당(新星學堂)’[새별배움터, 과거 자천교회에 설립된 신성학교를 일컬음]이라 이름 지은 전통 한옥 교육관으로 정비하여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를 이끌 새로운 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신성학당은 제1학당·제2학당·기도실·별빛문고·역사자료실·컴퓨터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Church Stay, 한국 기독교 역사 교실, 독서 교실, 문화 체험 교실[염색·제빵·목공예·농촌체험 등], 작은 음악회 등의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남신학대학교 영성 훈련장과 전국 교회의 각종 수련회 및 소그룹 교육과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천교회는 이제 단순히 둘러보고 가는 문화재 교회를 넘어 체험의 장으로 머무를 수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처럼 전국 어떤 교회도 갖지 못한 자천교회만의 독특한 하드웨어는 이제 종교적인 콘텐츠에서 문화적인 콘텐츠로 확장되어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그리고 외국인들까지도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영천시에서도 바로 이런 점에 유념하여 앞으로 재원을 더 투입하여 자천교회 일대를 기독교 역사 공간으로 조성하여 지역 발전에 활용하려 하고 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자천교회는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특성]
1. 예배당의 건축적인 특징
자천교회 예배당은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으로서 독특한 ‘겹집’ 양식의 ‘ㅡ’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은 ‘ㄱ’자형이나 정방형, 장방형 등의 형태가 일반적인 데 반해 자천교회는 똑같은 장방형 집 두 채를 나란히 ㅡ자형으로 배치한 겹집 양식으로 건축된 점이 아주 독특하다. 이러한 겹집 구조는 독특한 지붕 모양을 갖게 했다.
자천교회의 지붕은 아주 짧은 용마루를 가진 우진각 형태인데, 이는 전·후면에서 볼 때는 사다리꼴 모양이고, 양 측면에서 볼 때는 삼각형의 모양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고 내림마루가 없는 형태를 말한다. 자천교회 지붕이 극단적으로 짧은 용마루를 갖게 된 원인은 내부의 종도리[상량]가 활처럼 굽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종도리는 일직선으로 곧게 되어 있으나 자천교회 예배당은 종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이를 연결점으로 하여 종도리를 활처럼 굽게 하였다.
또한 겹집 구조는 넓고 높은 지붕을 갖게 했다. 따라서 지붕의 하중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서까래를 촘촘하게 하였으며 실내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인들의 예배당 건축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먼저 중앙의 기둥 열을 따르면 강대상(講臺床)에도 수직 기둥이 있어야 하지만, 이를 아치형의 기둥으로 대신하여 강대상 공간을 자연스럽게 확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초기 한국교회 예배당의 칸막이는 대부분 천으로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하였음에 반하여 자천교회는 나무 칸막이를 설치했다는 것이 독특하다.
그 이유는 중앙의 기둥들 때문에 휘장을 치는 것에 방해가 되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나무로 잇대어 칸막이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회중석에 앉아서 보면 벽처럼 높은 칸막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지만, 강대상의 중앙에서 보면 칸막이는 기둥에 가려 보이질 않아 설교자는 마치 열린 공간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며, 또한 남녀석 공간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천교회 예배당 건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투박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옥 예배당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고급스런 성공회 강화성당 예배당[1900년 건축]과 아주 대별된다. 강화성당의 목재는 백두산에서 가져왔고, 예배당의 일부 문짝은 영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대궐의 도편수를 데려와 지었기 때문에 굉장히 세련된 기법으로 목재를 잘 다듬어 지었다.
반면 자천교회는 시골 목수의 세련되지 못한 솜씨와 인근 보현산에서 난 목재를 가지고 나무 모양 그대로 투박하게 지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지혜를 발휘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 한 예로, 예배당 안 뒤편에 온돌방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고 들문을 달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천교회 예배당의 건축 양식과 기법들은 예배당은 물론 일반 한옥 구조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어 교회사적·건축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2.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 주는 구조물들의 의미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하면 우리는 서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선 예배당을 생각하더라도 첨탑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고딕 양식의 예배당을 주로 연상한다. 그러나 자천교회 예배당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그러한 선입견적인 이미지가 완전히 깨뜨려진다. 이는 복음을 수용한 우리 선조들이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를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담아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옥 예배당과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는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예배당을 짓더라도 서구식 예배당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 건축 양식을 이용하였고, 예배 시에도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유교적 가치관을 엄격하게 반영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바로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여기에는 복음과 문화와의 상관관계라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당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자천교회에도 중간에 남녀 석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다. 그런데 이 칸막이를 단순히 남녀를 구별하는 구조물로서만 이해하는 것은 부족하다. 자천교회 나무 칸막이는 일련의 변천 과정이 있었던바, 초기에는 현재의 높이로 지어졌다가 약 10~20년 정도 지나면서 그 높이가 1m를 조금 넘는 정도로 낮아지고, 이후 나중에 칸막이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토착화 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복음과 문화와의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은 그것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질 때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을 막론하고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라는 그릇 속에 담겨지게 된다. 그런데 문화라고 하는 그릇은 복음의 내용을 다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 말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질 때,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의 그릇은 유교적 가치관이었다. 따라서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가치를 가진 당시의 문화적인 그릇은 하나님 안에서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누는 복음의 진면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데에 한계를 보였던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 예배당 구조에서 보는 칸막이는 바로 이러한 예를 증거 하는 구체적인 결과물이다.
그런데 복음 안에는 하나님 말씀의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다. 그래서 문화라는 그릇 속에 담긴 복음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한계를 깨뜨려 간다. 자천교회의 경우, 초기 신앙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신앙이 점차 성숙해짐에 따라 교회라는 공간이 남녀가 내외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의 성숙으로 말미암아 칸막이의 높이가 낮아지고 결국에는 없어지는 변천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복음의 생명력과 역동성의 결과로 문화적인 한계를 깨뜨려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가 된다.
한편, 자천교회의 예배당 한쪽에는 낮고 조그마한 굴뚝이 있다. 대개 굴뚝은 높이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예배당의 굴뚝을 볼 때마다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의문을 가져 보게 된다. 우리 전통 가옥 가운데 간혹 낮은 굴뚝을 드물게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선조들의 마을 공동체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바로 이웃의 어려움을 예사로 생각하지 않는 배려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어려운 삶을 살던 때에는 마을 주변에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았다. 밥을 짓는 때가 되면 집집마다 높은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멀리서도 보인다. 밥을 굶는 이들은 멀리 굴뚝에서 나는 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자신들의 궁핍함에 더욱 마음 아파했다.
그러므로 낮은 굴뚝은 밥 짓는 연기가 멀리까지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높이를 낮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낮은 굴뚝은 밥을 굶는 이들이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마음 아파할 것을 염려한 우리 선조들의 이웃에 대한 애틋한 배려와 사랑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자천교회의 낮은 굴뚝은 마을 공동체를 생각하고 이웃을 염려하는 우리의 좋은 문화가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하라는 복음을 만나 더욱 상승하는 효과를 보여 준다. 즉 예배당 하나를 짓는 데에도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복음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이는 이웃을 외면하고 이웃을 압도하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우는 자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을 가진 교회가 되고자 하는 소박한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이 또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보여 주는 복음과 문화와의 적절한 조화의 실례가 된다.
3. 선교사(宣敎師)와 조사(助師), 권서(勸書) 들의 흔적을 간직한 방
자천교회 예배당 뒤쪽에는 양쪽에 똑같은 온돌방 두 개가 배치되어 있다. 요즘 교회의 이런 시설은 주로 유아실과 자모실 등의 용도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자천교회 방문객들은 으레 이 방도 그런 용도로 쓰인 줄 안다.
방문객들이 낮은 굴뚝을 옛날 쓰레기 통으로 오인하듯이, 이 방의 용도도 대부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만한 것이 옛 한옥 예배당 가운데서도 예배당 안에 방을 설치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방이 필요하다면 예배당 바깥쪽 한편에 부속 건물로 따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나, 자천교회는 아주 독특하게도 예배당 안에다 방을 시설해 놓았다. 그만큼 이 방의 용도는 다양한 쓰임이 있었다.
먼저 이 방은 초기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으로 너무나 귀중한 분들의 흔적과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방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데에는 두 그룹이 있었다. 첫째는 기독교를 전파하러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고, 둘째는 그들이 전한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토착 한국인들이다. 대한제국 말, 한국 땅에 들어 온 초기 선교사들은 그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한국의 복음화와 근대화[특히 의료와 교육 부문]를 위해 투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국 땅이 너무나 낯설고, 또 생소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선교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 줄 훈련된 현지인들이 필요했다.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없어진 ‘조사(助師)’라는 직분이었다. 자천교회 예배당 온돌방은 이들 선교사와 조사들이 머물렀던 공간이었다.
조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통역을 해 주기도 하고, 또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는 어학 선생이 되기도 하며, 여러 가지 잡무를 도와주는 개인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 비서가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집중적인 신앙 훈련을 받고 선교사들의 사역을 돕거나 대신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에게 사례를 받는 유급 교역자[안수는 받지 않았음]로서 선교사들처럼 여러 곳을 순회하며 그 역할을 감당했던 직분이다.
초기의 조사들 가운데는 권서인(勸書人) 출신들이 많았다. ‘권서인’이란 “책을 권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매서인(賣書人)[책을 판매하는 사람]이라고도 하였는데, 성경책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전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은 다름 아닌 전도인이었다. 이 권서인과 조사는 모두 토착 한국인들로서 한국교회의 첫 믿음의 선조들이다. 초기 한국교회가 든든한 기초를 다져 나가는 데 선교사들과 더불어 이들 권서, 조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였다.
일반적으로 초기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주로 선교사들의 역할만 많이 부각되어 왔다. 물론 복음 전파와 교회의 확장에 선교사들의 헌신이 중요하였지만, 이들과 함께 동역하였던 토착 한국인들, 즉 조사와 권서의 역할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직 정식적인 한국인 교역자가 배출되기 전, 선교사들의 헌신만으로는 두메산골 구석구석까지 교회를 세우고 세세히 돌보는 일을 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 선교사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들을 돌보았는데, 자천교회만 하더라도 이 시골까지 한정된 선교사들만으로는 매주 방문하여 교회를 돌볼 수 없었다. 때문에 조사들이 파송되어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설교를 하고 교회를 관리하였다. 그래서 사실 자천교회 예배당 온돌방은 선교사들보다 조사들이 더 많이 머물렀던 곳으로, 초기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선교사들과 함께 우리 토착 한국인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한편, 이 온돌방은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내륙 깊은 곳까지 전도 여행을 할 때 중간 기착지의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각 지역의 중요 도시에 선교지부[station]를 두고 이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대구·경북 지역의 선교 지부는 대구[나중에는 안동에도 선교 지부가 생김]에 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내륙 지방의 선교를 펼쳐 나갔다. 자천교회는 경북 내륙 지방인 청송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옛날 대구에서 자천교회까지는 걸어서 12~13시간 정도 소요되었는데, 아침 일찍 대구에서 출발하면 저녁 무렵에 자천교회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청송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 지점인 자천교회에서 하루를 묵고 가야만 했고, 이를 위해 자천교회 예배당 온돌방이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다.
또한 온돌방은 자천교회 교인들이 성경 공부를 했던 교육 공간이기도 하였고,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오지 않는 주중에는 교인들과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웃과 동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 공간이기도 하였다.
4. 교회를 통해서 완고한 시골 마을에도 여성 교육이 시작되다.
초기 한국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예배당으로서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학교를 함께 운영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문맹 퇴치 운동과 계몽 운동 등 여러 가지 민족적·사회적 역할을 교회가 감당하였다. 이는 당시 근대적인 공교육 기관이 없던 시절, 초기 한국교회가 사회의 중심에서 그 대안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말해 준다.
자천교회 역시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첫 입학생은 50명이었는데, 그 중에 여학생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이유는 학생들을 모집할 때 대부분의 가정에서 “계집아이 글 가르쳐서 뭐하느냐”며 딸자식을 보내 주지 않아 권헌중 장로의 맏딸[권수기 : 대구신명여학교 제2회 졸업, 평양신학교와 일본 아오야마신학교 졸업]이 유일한 여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을 주민들의 여성 교육에 대한 인식이 그때까지만 해도 전근대적이었다. 그 후에 차차 학교가 마을에 긍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어 여학생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되었다.
근대적인 공교육 기관이 없던 시절, 오랜 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의 역할을 감당했던 곳은 서당이었다. 그러나 서당은 남성들의 전유물로서 여성을 위한 공간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교회가 학교를 세워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문을 열어 준 것은 가히 획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교회가 사회적 한계 상황을 극복해 나간 좋은 증거가 된다. 특히 완고한 시골 주민들의 전근대적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즉 교육에 남녀 차별이 없는 교회가 교회학교를 통해 남녀 평등한 교육의 장을 열어 줌으로써 가부장 사회에 억눌렸던 여성들에게 해방 공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한계와 편견을 점차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데에 교회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현황]
초라한 농촌 교회로 쇠락했던 자천교회는 2005년도에 예배당 복원 공사를 마무리 하고, 2008년도에 기증된 한옥을 정비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다. 약 1300여 평의 대지 위에 예배당·사택·식당·상가 건물과 한옥 교육관 등의 부대 시설들을 갖추고 전국에서 연간 8천~1만 명의 방문을 수용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로 인해 현재 30~40여 명[담임목사 1명, 시무장로 2명]의 교인들이 섬기고 있는 소수의 교회이지만, 지역 속에서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는 큰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천시의 문화·관광 사업에도 적극 협조하여 보현산 일대의 자연 및 문화유산과의 네트워크 통해 지역 발전을 돕는 문화콘텐츠로서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실제로 영천시에서 운영하는 ‘별빛 나이트 투어’나 지역의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하는 ‘영천 문화 체험’ 등의 프로그램에 적극 활용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지역개발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경상북도와 영천시에서는 이러한 자천교회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높이 사 2010년 5월에 ‘자천교회 주변 성역화 사업’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11년도에 문간채 보수 공사를 완료하였다. 2012년도에는 별채와 대문채, 담장 일부를 보수하고, 앞으로 ‘자천교회 주변 성역화 사업’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복원 및 보수 공사가 완전히 이루어지면 더욱 편리하고 유용한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실시하고 있는 Church Stay, 한국 기독교 역사 교실, 독서 교실, 문화 체험 교실, 작은 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을 더욱 활성화하고, 또 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문화와 복지에 소외되어 있는 농촌 주민들의 생활에 더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가 남긴 신앙의 역사적 유산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예부터 보존되고 있는 예배당과 같은 건축물을 비롯해 신앙서적 등의 각종 유물이나 유품들을 말하며, 후자는 과거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하는 신앙 삶, 신앙 정신, 신앙 운동 등이라 할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이러한 과거의 신앙 유산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가시적인 건축물의 경우 그것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음에도 역사 인식의 부재, 성장 논리와 현실적 필요에 의해 훼손 또는 멸실되어 버린 것이 많았다. 무형의 유산은 유형의 유산을 통해서 더욱 살아 있는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과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우리 당대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앙은 과거, 현재, 미래 세대 간에 연속성과 역사성을 가지며, 이의 중요한 매개체가 유·무형의 역사 유산이다. 특히 유형의 유산은 무형의 유산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그것을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든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천교회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개신교의 초입 이래 토착화로부터 시작해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전 과정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는 교회는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많은 개신교 역사 유산이 훼손·멸실된 가운데 자천교회는 개신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변천 과정과 지역의 향토사 연구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