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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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梨旨廢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영호 |
[정의]
고려 말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있었던 행정 구역.
[개설]
이지폐현(梨旨廢縣)은 고려 시대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였는데, 고려 말에 이지현으로 승격되었다가 폐현(廢縣)되었다. 조선 태조 때 신녕현(新寧縣)에 편입되었는데, 이로 보아 이지폐현의 위치는 오늘날 신녕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신녕현 고적조에 “이지폐현(梨旨廢縣)은 현의 서쪽 20리에 있으니 본래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다. 고려 말년에 현(縣)으로 승격시켰고 인하여 영주에 소속시켰으며,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여기로 붙였다.” 하였다.
또, 『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에는 “후지원(後至元) 원년(1335년, 충숙왕 복위 4)에 상호군 안자유 등이 경사(京師)에 조회를 갔다가 돌아와 천후(天后)[원나라 황후(皇后)]의 명으로 부마이신 선왕에게 복명하여 말하기를, ‘영주의 이지은소는 옛날에 현이었는데, 중간에 고을 사람이 나라의 명을 어겼다 하여 현을 폐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한 뒤 백금(白金)[은(銀)]을 세금으로 부과하여 은소(銀所)로 불린 지 오래되었다. 지금 그 지역 출신인 나수와 야선불화가 어려서부터 금중(禁中)에서 환관으로 있으면서 심부름하는 노고를 많이 하였으니, 그 공에 보답하는 뜻에서 그의 고향을 승격시켜 다시 현으로 만들라.’ 하였다. 이에 국왕이 유사(有司)를 시켜 황후의 칙지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 나수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고려로 돌아와 고향을 방문하였는데, 옛터가 비좁다 하여 좋은 땅을 골라 고을의 서쪽으로 현을 옮겼다. 그곳은 옛터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이며,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모두 예전과 같이 두었다[至元後元年 上護軍安子由等朝京師廻 以天后命復駙馬先王 若曰 永州利旨銀所古爲縣 中以邑子違國命 廢而藉民稅白金 稱銀所者久 今其土人那壽 也先不花幼官禁中 積給使勞 其以功陞鄕貫復爲縣 於是王敎有司行之如中中旨 明年 那壽奉使東歸 爲鄕里榮 以故處庳狹 相地徙居州之西 距故所若干步 置縣司長吏咸若初]‘라고 하였다.
[변천]
이지폐현은 원래 이지현이었으나, 고을 사람이 나라의 명을 어겼다 하여 현을 폐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한 뒤 백금(白金)[은(銀)]을 세금으로 부과하여 이지은소(梨旨銀所)가 되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由) 등이 중국 원(元)의 수도에 조회를 갔다가 원나라 황후의 명을 받아옴에 다시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환관인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이 지역 출신이고, 원나라에서 환관으로 오래 재임한 공에 보답하려는 뜻에서였다. 그 이듬해에 나수가 고려로 돌아와 고향을 방문하였는데, 옛터가 비좁다 하여 현을 고을의 서쪽으로 옮김에 따라 폐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