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41 |
---|---|
한자 | 山南義陣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자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44년 - 정환직 출생 |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62년 - 정용기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12월 20일 - 정환직 사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 정용기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963년 3월 - 산남의진비 건립 |
현 소재지 | 산남의진 비 -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 1번지 |
성격 | 현충시설물 |
관련 인물 | 정환직|정용기|유석우|오규석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2.4m |
관리자 | 영천시장 |
문물|보호단위 등급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물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의 영천 문화원 내에 있는 구한말 영천 지역에서 조직되었던 의병 단체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
[개설]
산남의진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응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정환직(鄭煥直)[1844~1907]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1862~1907] 의병장을 비롯해 수많은 장병들의 공훈을 추모하기 위해 1963년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다.
정환직은 본관이 영일(迎日)이고, 자는 백온(伯溫), 초명은 치우(致右), 호는 동엄(東嚴)으로, 1887년(고종 24) 서울의 북부도사(北部都事)를 시작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도사),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 토포사(討捕使),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 삼남검찰사(三南) 겸 토포사, 도찰사(都察使), 중추원의관 등의 주로 치안을 담당하는 벼슬을 지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 진압을 위해 정부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병의뢰반대소(日兵依賴反對疏)」를 올려 그 부당성을 통박했고, 1899년 종묘(宗廟)에 불이 나자 고종을 업고 대피시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자신은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을 후원하기로 하고 아들 정용기를 영천으로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정환직은 서울에서 내외 정세를 살피면서 전국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병과 무기를 모아 의병 부대에 내려 보내고, 격문을 붙여 반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1906년 3월 6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했다. 활동 범위는 영천[자양면·입암리]·포항[현재 경주 신광면도 포함]·군위[의흥]·청송·영덕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다가 입암 전투에서 순국하게 되었다. 이에 정환직은 영천으로 내려와 산남의진의 2차 대장을 맡아 활약하다 붙잡혀 총살당한다.
이후 몇 차례 산남의진이 재정비 되어 보현산 등지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 비록 고종의 뜻으로 영천에서 창의해 강원도로 북상한 다음 서울로 진격해 일본군을 쫓아내겠다는 정환직의 목적은 무산되었지만 이후 계속되는 의병 조직의 탄생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건립 경위]
1905년 일본군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이에 분노한 고종은 충신인 정환직에게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느냐 짐망(朕望)”이라는 밀지를 내려 산남의진을 창의하게 된다. 산남의진은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가 1차로 대장이 되어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해 영천·포항·의흥·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다 영천 입암 전투[현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서 순국하게 된다.
이에 정환직은 영천으로 내려와 산남의진의 2차 대장을 맡고 신녕·의흥·흥해·청하·영덕 등에서 활약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영천 조양각 아래에서 총살당한다. 이런 산남의진의 구국활동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3년 3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환직, 정용기를 비롯해 장병들의 명단을 새기고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비문은 풍산인(豊山人) 유석우(柳奭佑)가 짓고 해주인(海州人) 오규석(吳圭錫)이 썼으며 경상북도의 후원으로 산남의진 기념 사업회에서 비를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치]
산남의진비는 현재 영천 문화원 건물 앞에 있다. 영천 문화원은 영천군의 치소로 포은 정몽주가 건립한 명원루[현재의 조양각]가 있었던 터로 알려져 있다. 영천 서문 오거리에서 포항 방면으로 오면 남문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해 야트막한 언덕길에 올라서면 우측에 바로 조양 공원이 있다. 비는 이 공원을 들어서 영천 문화원 쪽으로 들어오면 보인다.
[형태]
산남의진비는 조양 공원 내 영천 문화원 입구에 축대, 기단, 비로 구성되어 남향하고 있다. 비는 비좌와 비신(碑身) 그리고 비갓을 표현했는데 전통적인 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우선 축대는 아주 작은 규모로 마치 2중 기단의 하층 기단으로도 보인다. 1970년에 발행된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를 보면 축대 밖에 비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재 난간 기둥을 세우고 두 줄의 쇠사슬로 둘렀지만 현재는 없어지고 낮은 외벌대의 화강석 연석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조경을 해놓았다.
축대는 화강암으로 면을 마감하고 가장자리에 난간을 설치했다. 난간은 네 모서리와 1면당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철제로 막았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입면 가로로 긴 장방형이다. 기단 위에 방형의 비좌를 놓고 비를 세웠다. 비신에는 전면에 비명을 새겼다. 비몸 위에는 쌍용을 조각한 비갓이 있다.
[금석문]
산남의진비에는 비몸 전면에 세로로 두 줄의 비명을 새겼다. 좌측에는 ‘대장정공양세순국기념(大將鄭公兩世殉國紀念)’이라는 모두 10자의 비명을 새겼는데 바로 산남의진의 대장이었던 정환직과 그의 아들 정용기를 가리킨다.
우측에는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라는 비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좌측보다 두 배 정도 크게 썼다. 비의 좌·우 배면에는 비문과 장병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끝에 ‘단군기원4296년 계묘3월 일’이라는 건비년대(建碑年代)와 ‘풍산 유석우(豊山 柳奭佑) 지음 해주 오규석(海州 吳圭錫) 씀’이라는 비문 작성자 그리고 맨 끝에 ‘경상북도 후원(慶尙北道 後援)으로 산남의진기념사업회(山南義陣記念事業會) 세움’이라는 건립 주최를 새겼다.
단기 4296년은 서기 1963년이다. 비문에는 모두 800여 자의 한자와 한글이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분노한 고종은 충신 정환직에게 밀명을 내리고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산남의진을 창의해 강원도로 진격하라는 분부에 따라 아들 정용기는 조직 후 영천[자양, 입암[현재의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포항[흥해, 청하, 신광], 청송, 영덕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입암에서 순국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현황]
영천 문화원 건물 앞에 있는 산남의진비는 국가보훈처의 현충 시설물로 지정 되어 있으며,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비의 서쪽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조양각이 있다. 한편 산남의진비 외에 조양 공원 내에는 영천지구 전승비, 황성 옛터 시비, 조선 시대 역대 군수 및 관찰사 등의 선정비가 있는 사현대가 있어 역사 체험의 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산남의진과 관련되는 유적으로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 정환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영천 충효재[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와 산남의진 정대장 양세출신 충효동 사적비가 있다.
자양면 충효리의 지명은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충정으로 인해 생긴 지명이다. 또 최근 자양면 용산리에 산남의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포항시 흥해읍 성내동에는 한말 의병 항왜 혈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국가보훈처 경주보훈지청 소속 영천 항일 독립운동 선양 사업회에서는 2007년 12월 27일 산남의진비 정면에 안내문을 표지석 형태로 설치했다.
[의의와 평가]
구한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응하여 조직한 산남의진은 정환직·정용기 2대에 걸친 대장의 충정으로 구국을 향한 영천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비의 형태와 특징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전국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던 의병 활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영천 출신인 최무선·정몽주·박인로·이형상·정세아·권응수로 이어지던 구국 활동의 대표적 인물에서 정환직·정용기로 그 맥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영천인은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