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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095
한자 鄭裕俊
이칭/별칭 경부(慶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87년 2월 2일연표보기 - 정유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20년 - 정유준 무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46년 - 정유준 삼수도호부사 겸 병마첨절제사에 임명됨
몰년 시기/일시 1852년 2월 19일연표보기 - 정유준 사망
묘소|단소 정유준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죽곡리 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영일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무인.

[개설]

영일 정씨(迎日 鄭氏)는 고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였던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 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를 지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 공조판서(嘉善大夫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가계]

정유준(鄭裕俊)의 본관은 영일. 자는 경부(慶夫)이다. 고조는 정석달(鄭碩達)이며, 증조는 통덕랑(通德郞) 정일빈(鄭一鑌), 조부는 정하온(鄭夏溫)이다. 부친은 정성휴(鄭星休)이며, 모친은 대구 서씨(大丘 徐氏)로 서유이(徐有儞)의 딸이다.

선처는 숙부인(淑夫人) 성주 이씨(星州 李氏)로 이복인(李復仁)의 딸이며, 후처는 신광 진씨(神光 陳氏)로 진동발(陳東發)의 딸이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니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정원재(鄭元在)와 무과(武科) 선달(宣達) 정인재(鄭仁在), 통덕랑(通德郞) 정신재(鄭臣在)·정문재(鄭文在)·정기재(鄭璣在)이며, 사위는 구산인(龜山人) 박기식(朴基植)과 울산인(蔚山人) 이원찬(李瑗燦), 청안인(淸安人) 이구화(李球和)이다.

[활동 사항]

정유준은 1787년(정조 11) 2월 2일에 태어났다. 1820년(순조 20)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이듬해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충주첨사(忠州僉使), 쌍수진장(雙樹鎭將)을 역임하였다.

1829년(순조 29) 절충장군(折衝將軍)과 부호군(副護軍), 충익위장(忠翊衛將)에 오르고, 지방관으로 나아가 공주진장(公州鎭將)이 되었다. 다시 내금위장 겸 사복장(內禁衛將兼司僕將)을 거쳐 통정대부 원주도위 겸 횡성현감(通政大夫原州都尉兼橫城縣監)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정유준은 1836년(헌종 2)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귀향하여 3년상을 치렀고, 상을 마칠 즈음 나주진장 겸 포토사(羅州鎭將兼討捕使)를 거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올랐다.

1846년(헌종 12) 삼수도호부사 겸 병마첨절제사(三水都護府使兼兵馬僉節制使)에 제수되었으며, 1850년(철종 1)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852년(철종 3) 2월 19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정유준의 묘소는 영천시 화남면(華南面) 죽곡리(竹谷里) 정자등(亭子嶝)에 있으며, 제헌의원(制憲議員) 정도영(鄭島榮)의 갈문(碣文)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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