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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178
한자 永川-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3년 -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 「영천 아리랑」을 북한에 소개한 후 널리 퍼짐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7년 - 북한과 해외동포들이 부르는 「영천 아리랑」국내에 알려짐
성격 민요

[정의]

일제 강점기 영천 지역 및 만주로 이주한 영천 사람들이 불렀던 아리랑 노래.

[개설]

「영천 아리랑」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향수에 젖어 고향 영천에서 부르던 노래를 되살려 마음으로 불렀던 노래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로 떠난 사람들은 지식층들이 많았고, 특히 예술적 기질로 자유와 억압에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인 해방의 길을 찾아 떠난 경우가 많았다.

「영천 아리랑」은 이역(異域)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 버려진 들판을 개척하던 한 많은 민족의 설움을 담은 노래로 동포들의 가슴에 새겨진 아픈 흔적의 각인(刻印)이라 할 수 있다.

「영천 아리랑」은 만주에서 널리 불리다가 북한으로 전해졌고, 다시 조율을 거쳐서 영천으로 전해져 정착되었다. 이처럼 「영천 아리랑」은 한 세기 민족혼의 기록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채록/수집 상황]

북한과 해외동포들이 즐겨 부르는 「영천 아리랑」의 존재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7년이다. 당시 영천문화원 김태원 원장이 중국 연변에 「영천 아리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디(CD)와 테이프를 구입했지만, 한자가 똑같은 북한 영천과 구별이 되지 않아 망설이다가 KBS에서 방영된 일요스페셜 「남과 북 함께 부르는 노래」에서 경상북도 「영천 아리랑」임을 확인했다.

이어 평양출판사에서 발행한 『문화예술사전』에서 “「영천 아리랑」은 대구와 함께 사과가 많이 나는 고장인 경상도 영천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을 거듭 확인했다.

「영천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 영천에서 불렸지만 곧 사라지고, 이곳 주민들이 만주와 중앙아시아, 중국 연변 등지로 옮겨 살면서 노랫말과 곡조를 널리 퍼뜨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는 1993년 연변대학의 박창욱 교수가 「영천 아리랑」을 소개한 이후 전역에 널리 퍼졌다.

[구성 및 형식]

「영천 아리랑」은 5박자 구조인 「강원도 아리랑」 가락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아리랑이 대부분 구슬픈 가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툭툭하고 활발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의 아리랑에 비해 빠르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내용]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아주까리 동백아 더 많이 열려라 산골 집 큰 애기 신바람난다.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탐스런 산열매 골라서 따들고 산골 집 큰 애기 임생각 하네.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해마다 산열매 무르익으니 큰 애기 사랑도 사랑도 열매를 맺네.

아리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멀구야 다래는 단맛에 먹구요 살구나 딸기는 신맛에 먹는다.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 주소.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영천 아리랑」은 최근까지만 해도 영천시민들에게 다소 생소한 노래였다. 그것은 「영천 아리랑」이 영천 지방에서 구전되지 못하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의 동북 삼성이나 연해주, 중앙아시아 동포들을 통해 먼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영천 아리랑」에 관련된 자료는 영천에서 발굴되지 않았다.

「영천 아리랑」은 중국 흑룡강성이나 길림성, 러시아의 연해주나 중앙아시아에서 아리랑을 주의 깊게 들어본 사람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소리였다.

중국 연변 지역에서 발행되는 『민요곡집』과 『가요집성』 등에도 실려 있고, 1994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영천 아리랑」을 처음 녹음했고, 이듬해에는 음반 『해외동포 아리랑 CD-중국 러시아편』[신나라레코드, 1995]으로 소개되었으며 방송을 통해서도 보도되었다.

중국 및 연해주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북한에서도 예술교육출판사에서 발간한 『조선의 노래』 등의 민요집, 심지어는 우리의 노래방 반주와 같은 『화면노래반주곡』 비디오테이프에도 실려 있다.

[현황]

영천시는 문헌적 고증과 현지 학술조사를 거쳐 영천아리랑보존회, 한국연예협회 영천지회 등과 함께 ‘화합의 노래 영천 아리랑, 꿈과 희망이 담긴 영천의 노래’ CD 1천여 장을 만들어 초·중·고교와 문화단체에 나눠 주었다.

또한 영남아리랑대축제에서도 「영천 아리랑」을 지정곡으로 하여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영천문화원도 민요반을 운영하는 등 「영천 아리랑」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천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 이주하여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일구월심(日久月深) 부를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과 시대적 특수성에서 발전된 민요라 하겠다.

「영천 아리랑」에는 몸은 비록 영천을 떠나 있어도 감성과 뿌리를 잊을 수 없었던 영천인들의 삶의 애환과 고난의 역사가 녹아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영천아리랑 카페(http://cafe.daum.net/jayang1234)
  • ‘화합의 노래 영천아리랑 꿈과 희망이 담긴 영천의 노래’(영천아리랑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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