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2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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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甁窩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규 |
간행 시기/일시 | 1744년 - 만송 『병와집』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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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 영인본 『병와전서』 간행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국역병와집』 간행 |
소장처 | 병와유고각 - 경상북도 영천시 거북바위길 30[성내동 97-1]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
간행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
성격 | 문집 |
저자 | 이형상 |
권책 | 18권 9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32 20.3 반곽 20 15 |
어미 | 내향2엽화문어미 |
권수제 | 병와선생문집 |
판심제 | 병와집 |
[정의]
1744년에 간행된 경상북도 영천 출신 실학자 이형상(李衡祥)의 문집.
[개설]
『병와집』은 18권 9책의 목판본으로 손자 만송(晩松)이 1744년에 간행했다. 서문은 채제공, 발문은 이상정(李象靖)이 썼으며, 권1~3은 시, 권4는 악부·잠·명이다. 그는 악부 서문에서, 한국에서는 아악이 없어 악부를 지을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해 오음(五音)을 잃지 않으면 악부를 지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권5는 전(箋)·소(疏)로 되어 있으며 소는 사직소이다. 권6~11은 서간으로 천문·지리·의례·외교 등 다방면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특히 권6, 7에 실려 있는 중서(仲舒) 이만부(李萬敷)와의 편지는 천문과 의례에 관한 것으로 소논문이라 할 수 있는 체계적인 글이다.
권12는 잡저이다. 물칙편(物則篇)은 총 34편으로, 유교의 기본개념에 따라 부자관계나 교육과 같은 각종 인간사와 자연의 이치를 서로 연결시켜 원리와 당위성을 해설한 짤막한 글들이다.
「자집고이의(子集考異義)」는 서경덕의 「허자기지연(虛子氣之淵)」, 장현광의 「여헌풍운뇌우도(旅軒風雲雷雨圖)」 같이 여러 책에 기록된 논제들을 주자나 이황 등 여러 성현의 학설과 비교, 논변한 글이다.
권13도 잡저이며, 마지막에 노비속량 계권(契券) 2편을 실었다. 하나는 자신에게 충성한 솔거노비를 방량하며 말 1필을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문 전래의 외거노비 일가가 여러 번 찾아와 곡식을 바치며 속량을 원하는바 이미 일가 중에 유생이 된 자도 있으니 방량한다는 것이다.
권14는 서·발문 등이다. 「탐라순력도서(耽羅巡歷圖序)」는 1702년 절제사로 갔을 때의 기록인데 제주도 우마의 수, 감·귤 등 각종 과목의 수, 훈장·유생·무사의 수까지 기록했다.
권17, 18은 그가 지방관 시절에 올린 장계와 첩(牒)이다. 장계는 새로운 개혁안보다는 현지의 통계자료를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 실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래관방변통장(東萊關防變通狀)」은 임진왜란 이후 동래 왜인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으므로 동래에 배정된 목자(牧子)·수군사부(水軍射夫)·파발 등 각종 역인(驛人)을 부근에 옮기고 여러 아문의 군병을 동래부병으로 통합하여 2천 명을 확보하자는 의견이다.
「동래차왜문답장계(東萊差倭問答狀啓)」는 왜관 무역 및 일본인과의 교류 상황을 보여주는 글이며, 「제주민막장(濟州民瘼狀)」은 제주도민의 부세·공물부담의 애환을 소개하고 이정책(釐整策)을 올린 장문의 글이다. 제주도의 인구·종류별 공물액·전지(田地)와 농업사정·목장관리·해산물 공납 등의 실상을 상세하게 적고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제주청사전변통장(濟州請祀典變通狀)」은 국가 제사인 사전이 제주도에서는 잘못된 것이 많음을 알리고 제주도의 상황을 고려하여 정비할 것을 청한 상소로서 제사별 시행안을 기록한 여러 편의 상소이다.
「성주전정변통첩(星州田政變通牒)」은 성주 지역의 양전(量田) 관행과 토지상황을 기록했으며, 「경주정전기지범할청립금첩(慶州井田基址犯割請立禁牒)」은 평양보다 잘 남아 있는 경주의 정전지(井田地)를 보호할 것을 청한 것이고, 부록에는 행장을 수록했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는 이 문집은 그의 저작의 일부에 불과하다. 저자는 예·악·역학·사회·역사지리 등 다방면에 걸친 총 60여 종 2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스스로 총목록과 색인까지 작성해두었다.
이 원고는 미간행으로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보물 제625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내용은 『악학편고』·『악학습령』·『강도지』·『남환박물지』·『탐라순력도』·『둔서록』 등으로 1982년 정신문화연구원이 『병와전서』로 간행했다.
[저자]
병와 이형상[1653~173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성균진사를 지낸 이주하(李柱夏)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를 거쳐 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호조좌랑을 지내다가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덕유산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로 있을 때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던 3읍의 성묘를 수리하여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글을 가르치게 했으며, 몽매한 풍속을 타파한다면서 129개의 신당을 불태우는 등 불교와 토착신앙을 배척하고 유교를 권장했다. 1727년(영조 3)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영천에 호연정(浩然亭)을 세워 학문에 힘쓰면서 『둔서록(遯筮錄)』을 초안했다. 1728년 가선대부가 되고, 소론의 일파인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경상도 소모사가 되었으나, 같은 소론으로서 당론을 누설했다는 무고를 받고 잠시 투옥되었다.
벼슬은 한성부윤에 이르렀고, 1735년 영천의 성남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829년(순조 29)에는 제주유생들이 그를 기려 영혜사(永惠祠)에 제향했다.
시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자료를 널리 모았으며, 시조를 한역한 작품 77수를 남겼다. 저서에 문집 『병와집』·『둔서록』·『강도지(江都志)』·『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악학편고(樂學便考)』·『예학편고(禮學便考)』·『성리학대전』 등 다수가 있다.
[편찬/간행 경위]
『병와집』의 유고로는 『병와선생문집』 수고본 2종이 남아 있다. 숙종 조에서 영조 연간에 수고본으로 작성된 것으로 14권 7책으로 31×20.8㎝, 유선 12행 20자로 된 고본과 31권 9책의 수고본 30.5×20.7㎝ 유계선 12행 17자로 된 수고본 2종이 남아 있다.
이후 병와의 손자 만송(晩松)이 18권 9책의 목판본으로 1744년에 간행했다. 『병와집』은 그 고본인 수고본 2종 외에 유고부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목판본도 유고각에 보존되어 있다.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전연구실에서 『병와전서』 10권 가운데 제1권으로 영인 간행하였으며, 199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전연구실에서 국역총서 90-3으로 『국역병와집』으로 간행되었다.
[형태/서지]
『병와집』의 유고 2종과 유고부록 1종이 원본으로 남아 있는데 먼저 『병와선생문집』[유고본 1]은 숙종~영조 연간에 병와가 직접 쓴 수고본으로 저지에 14권 7책, 31×20.8㎝, 반곽 22.5×16.7㎝ 유계선 12행 20자로 된 것과 역시 『병와선생문집』[유고본 2]도 숙종~영조 연간에 병와가 직접 작성한 수고본으로 저지에 31권 9책[권1~4 결책]으로 30.5×20.7㎝ 반곽 23×16.3㎝, 유계선 12행 17자로 된 2종류가 있다.
또한 「유고부록」은 역시 숙종~영조 연간에 병와가 직접 쓴 유고본 1책 29×22㎝ 12행 20자로 작성된 서간문 부록이 남아 있는데, 이 유고를 토대로 하여 본집 18권과 부록 및 행장 1편을 붙여 『병와집』이라는 이름으로 1772년(영조 50)에 규장각에서 간행하였다.
『병와집』은 목판본으로 영조 48년(1722)에 18권 9책으로 간행하였다. 외곽 32×20.3cm, 반곽 20×15cm, 유계선 10행 20자로 주 상행, 내향2엽화문어미로 되어 있다.
[구성/내용]
『병와집』 권1은 병와집 서,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2는 시문, 권3은 시문과 악부로 구성되어 있다. 권4는 악부·잠·명·송·찬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5는 전·소·서, 권6~11은 서, 권12는 잡저와 자집고 이의, 권13은 잡저, 권14는 서·기·발·상량문·축문, 권15는 제문·묘지, 권16은 묘지·묘갈·뇌, 권17은 자·첩, 권18은 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병와이형상행장과 대산 이상정의 발문이 있다.
권1~3에는 성고구곡·칠탄 등 영천 호연정을 중심으로 한 경관을 노래한 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악부에 대한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권4의 명에는 제주목사 시절에 만든 단금[거문고]의 명문과 함께 찬에는 공제 윤두서가 그린 오성현의 그림에 대한 찬이 실려 있다. 권5의 소에는 관방 수비수어책략에 대한 「강도지」를 올린 소가 실려 있으며, 서에는 식산 이만부와 공제 윤두서와의 예악 및 천문 지리에 대한 서답이 실려 있어 근기남인계열의 실학파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권11에는 주로 가족과 나눈 각종 서찰을 정리한 서가 실려 있으며, 권12의 잡저에는 천문학적 소설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병와의 실학적인 학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권13의 잡저 마지막에 가노 선일과 맺는 계권, 가노 인발과의 약문은 당시의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주는 명문서이다. 권14에는 자신이 쓴 『가례편고』·『문주연』·『탐라순력도』의 서문을 비롯한 자술한 저서의 서문이 실려 있다. 또 축문에는 제주 삼성묘의 봉안 축문과 춘추상향의 축문 등이 실려 있다.
권15의 묘지에는 종실의 서원군 이안공 묘지명을 비롯한 묘갈명 등이 실려 있다. 권17에는 목민관으로 재임하면서 여항의 백성을 위한 각종 개혁적 의지가 담겨 있는 장계가 다수 실려 있다. 동래 관방의 변통장, 동래 차왜와 문답한 장계, 제주의 민폐를 개혁하기 위한 장계와 더불어 첩에는 성주 전정에 변통첩, 성주의 기민의 진휼을 위한 첩, 경주 지역의 정전법에 관련된 첩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병와 이형상은 조선 후기 실학적 관점에 기반을 둔 성리학자로 오랜 외직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국방 관방에 대한 철저한 의식과 여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탁월한 실천적 지식인인 동시에 목민관으로서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학자이다.
본 문집을 통해 그의 다방면에 걸친 짓기의 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우선 악부의 형식을 체계화하고 다량의 작품을 남겼는데 예악 겸비론을 토대로 한 『가례편고』와 같은 가례서와 『악학편고』와 같은 매우 중요한 예학서를 남겼다.
임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조에서 외세 침략에 대한 수비수어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리 관방과 관련된 다량의 저술을 남겼다. 『강도지』·『남환박물지』·『탐라순력도』 등의 저술에서는 봉수대와 지역 군관의 조직에 대한 치밀한 시각이 반영된 저술들을 남겼으며 서술의 방식 또한 계량적 방식의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지방 목민관으로서 지방의 조세 개혁의 목소리를 담고 또 과도한 수조에 대한 개혁을 여러 차례 조정에 호소한 민막을 위한 목민관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