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2295 |
---|---|
한자 | 鄭宜藩忠孝閣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훈 |
건립 시기/일시 | 1784년 - 정의번 충효각 건립 |
---|---|
현 소재지 | 정의번 충효각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
성격 | 비|비각 |
양식 | 초익공|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문물|보호단위 등급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정의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효각.
[개설]
정의번(鄭宜藩)[1560~1592]의 본관은 영일,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柏巖)으로 정세아(鄭世雅)의 아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박소’에서 권응수와 정대임이 승리하는데 앞장섰고, 아버지 호수 정세아와 함께 의병[창의정용군]을 조직해 영천성 복성(復城)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영천성 탈환 후 경주성 전투에서 역세에 몰린 정의번은 아버지와 떨어지게 되고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는 포위망을 벗어났고, 이 사실을 몰랐던 정의번은 온몸이 창에 찔리면서도 적진 속에서 아버지를 찾아 헤매며 고군분투했지만 적을 막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적진을 향해 쳐들어 갈 때 그의 종인 억수에게, “아버지는 이미 전사하신 것 같으니 어디로 돌아가겠느냐면서 나를 떠나거라.”하니 억수가 슬퍼하며, “주인님이 죽기를 결심했는데, 어찌 혼자 살 수 있습니까?”하며, 억수는 끝내 정의번을 떠나지 않았다. 적에게 포위당한 정의번은 굴하지 않고 억수와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후에 아버지가 아들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공이 평소에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서 초혼을 해 와 빈소를 만드니 많은 사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만시(挽詩)를 보내왔다. 시신 대신 만시를 관에 넣고 장사를 지내니 후세 사람들이 이 묘소를 일컬어 시총(詩塚)이라 불렀다.
정의번의 묘소 아래 억수의 무덤을 만들고 ‘충노 억수의 묘’라는 작은 빗돌을 세워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정의번의 충효가 알려져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증직되었다가, 1612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를 세워 제향되었다.
[위치]
정의번 충효각이 있는 선원리는 영천에서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 영일 정씨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변천]
정의번 충효각은 정의번의 충효가 알려져 왕명에 의해 1784년(정조 8)에 충효각을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정의번 충효각은 단칸 규모의 맞배지붕 목조 건물로 일반적인 비각 형태이다. 전면에 ‘충효각(忠孝閣)’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비각은 원형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주 상부에 초익공 양식의 건물이다. 벽은 홍살 벽으로 처리하고 건물 전체 목부재에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엇다. 건물 내부에는 비석 없이 후면 상부에 편액만 걸려 있다.
[현황]
정의번 충효각은 1784년 세워졌으나 현재의 건물은 후대에 중수 또는 중건된 건물이다. 정의번의 묘소는 자양면 성곡리에 있으며, 오광운(吳光運)이 찬(撰)한 시총비(詩塚碑)가 있다. 정의번의 묘소 아래에는 충노 억수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