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174
한자 永信里
영어공식명칭 Yeongsi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개설
영신리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3.918㎢
가구수 169가구
인구[남/여] 355명[남자 180명|여자 175명]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영암군 옥천시면의 지역으로 영신원(永信院)이라 부르다가, 영신으로 바뀌었다. 마을 이름에 원(院) 자가 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묵고 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신리(永信里) 명칭이 유래하였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영암군 옥천시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06년(광무 10) 해남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안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로 개설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신리(永信里)옥천면소재지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해남읍과 가까운 영춘리로 면사무소가 옮겨졌다. 현재 영신리는 영신마을, 영안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영신마을은 1634년 용정에서 이주한 양도남(梁道南)[1607~1667]이 최초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양도남의 할아버지인 양산형(梁山逈)[1545~1603]이 1567년 하동정씨와 혼인하여 화순에서 옥천 대산으로 이거하였고, 양산형의 둘째아들 양범용이 옥천 대산에서 용정으로 이주하였으며, 양범용의 장남인 양도남이 용정에서 영신으로 이주하였다. 제주양씨가 영신으로 이주하기 전에 박씨들이 선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도남의 행장에 영신마을에 박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안마을은 1830년경 양봉여가 영신마을에서 이주하여 넓은 토지를 경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해남윤씨 용산공파가 처음으로 마을에 정착하였다고도 본다.

[자연환경]

영신리만대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과 평지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영신마을은 만대산이 호두봉을 타고 내려와 치마처럼 펼쳐진 곳에 터전을 잡고 있다. 영안마을은 들 가운데 있는 평야촌이다.

[현황]

영신리(永信里)는 북쪽으로 신계리, 동쪽으로, 용산리, 남쪽으로 영춘리, 서쪽 해남읍 해리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3.918㎢이며, 영신리, 영안리의 2개 행정리에 169가구, 355명[남자 180명, 여자 17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소득원은 벼 농사이며, 밭작물로 마늘, 고추, 콩 등을 재배하고 있다. 특작물로는 단감과 포도, 상황버섯, 담배, 양파 채종포, 밤호박 등을 들 수 있다. 단감은 1968년 양달승이 처음 재배하기 시작하여 해남에서 가장 많은 단감을 생산하는 마을이 되었다. 한우와 젖소를 대단위로 키우는 축산농가가 있다.

영신리에는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의 영정을 봉안한 덕촌영당이 있다. 또 일제강점기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한 양한묵의 생가터가 있다. 또한 옥천농공단지해남교도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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