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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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南四六萬歲運動 |
영어공식명칭 | Haenam April Sixth Mans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이성운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04월 06일 - 해남 4·6만세운동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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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9년 04월 06일 - 해남 4·6만세운동 종결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03월 01일 - 해남 4·6만세운동 3·1만세운동 영향으로 만세운동 계획 |
발생|시작 장소 | 해남 장터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
종결 장소 | 해남 장터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
성격 | 독립 만세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김규수|김한식|임영익|윤준하|이사국|김명곤|김영휘|이재실|이준탁|윤백인|신건희|윤옥하|임영식 |
[정의]
1919년 4월 6일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해남공립보통학교 생도 김규수(金奎秀)는 일제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김규수는 해남보통학교 기숙사 방에서 김한식(金漢植)·신건희(申健熙)·윤옥하(尹玉夏)·임영식(任永植)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기로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경과]
1919년 4월 2일 김규수·김한식·임영식은 기숙사 생도 윤준하(尹俊夏)·이사국(李士國) 등을 동지로 모으고, 4월 3일에는 김명곤(金明坤)·김영휘(金永輝)·이재실(李在實)·이준탁(李準鐸) 등 생도들을 모았다. 1919년 4월 5일에는 김규수·김명곤·신건희·이재실 등이 해남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1919년 4월 6일 해남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준비하였다. 김규수·윤백인 등은 돈을 모아서 서양 천과 물감 등을 구입하였으며, 김성암·윤준하 등과 함께 천으로 만든 태극기 80개와 작은 태극기 8개, 종이 태극기 80여 개를 만들었다. 신건희는 독립선언 광고문을 기초하고, 김규수·윤옥하·임영식 등은 이를 등사하였다. 1919년 4월 6일 오후 1시경 해남읍 장날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김규수·김한식 등은 준비하였던 태극기와 광고문을 감추어 시장으로 먼저 들어가 동료 학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 시장에 있던 군중 1,000여 명도 독립 만세를 큰소리로 외쳤다.
[결과]
해남 4·6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대가 해산되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김규수 등 해남공립보통학교 생도 16명은 태형(笞刑) 또는 10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해남 4·6만세운동 이후 해남 지역민들의 항일 의식과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지면서 1919년 4월 11일 김동훈(金東勳)이 주도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1919년 4월 16일 검속당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며, 1920년 4월 23일 만세 운동 등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해남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