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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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億祺 |
영어공식명칭 | Lee Eokgi |
이칭/별칭 | 경수(景受),의민(毅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윤섭 |
출생 시기/일시 | 1561년 - 이억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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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7년 - 이억기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1년 1월 20일 - 이억기 전라우수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97년 - 이억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00년 - 이억기 여수의 충민사에 배향 |
부임|활동지 | 온성부사 - 평안북도 운산군 |
부임|활동지 | 순천부사 - 전라남도 순천군 |
부임|활동지 | 전라우수사 - 전라남도 해남군 |
사당|배향지 | 용정사(龍井祠)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용정길 14[용정리 602] |
성격 | 무인 |
성별 | 이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온성부사|순천부사|전라우수사 |
[정의]
조선 후기 해남 용정사에 배향된 무신.
[개설]
이억기(李億祺)[1561~1597]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수사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왜적을 격파하였다.
[가계]
이억기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수(景受),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심주군 이연손(李連孫)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이억기는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었으며, 북방의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이억기는 순천부사를 거쳐 1592년 1월 20일 전라우수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원균 등과 함께 당항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해전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전라좌도·전라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 준비를 돕는 한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자 이항복(李恒福), 김명원(金命元) 등 조정 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 무죄를 적극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억기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 명령을 받고 부산에서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하여 원균,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억기는 임진왜란 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책정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고, 해남읍 용정리의 용정사(龍井祠)에도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