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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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공식명칭 |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원종 |
[정의]
삼국 시대~조선 시대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 흙이나 돌로 축조된 관방 시설.
[개설]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합하여 이르는 명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내성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지칭하고 있다. 즉, 성곽은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의 활동 공간을 흙이나 돌 등으로 연결한 구조물로서, 일반적으로 성벽이라 불리운다. 고대 국가 초기에는 목책(木柵), 도랑과 같은 방어 시설물을 설치하였으나, 3세기 이후 고대 국가의 영토 확장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석성이 많아졌다.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고대 성곽은 산에 많이 쌓고 돌을 주재료로 삼았는데, 특히 삼국 간의 국경 지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고려 말~조선 초기에 성곽의 축조가 다시 한번 크게 이루어졌는데, 왜구의 침범이 잦은 해안 지역에 읍성(邑城)이 축조되었고 내륙 지역에서도 불시의 변(變)에 대비하고자 읍성의 축조가 활발해졌다.
삼국 시대의 무주 지역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접해 있는 국경 지대를 이룬다. 현재의 무주군 무주읍 지역은 백제 적천현(赤川縣)의 영역에 속하였고, 현재의 무풍면 지역은 신라 무산현(茂山縣)의 영역에 속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무산현이 무풍현(茂豊縣)으로 개칭되었고, 1414년(태종14)에는 무풍현과 주계현(朱溪縣)을 합쳐 무주현(茂朱縣)으로 고치어 주계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한편, 적상산성(赤裳山城)은 고려 말 장군 최영(崔瑩)의 요청으로 축조되었고, 광해군(光海君) 때에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를 짓고 임진왜란 이후에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였다. 이처럼 무주 지역에서는 삼국 시대 지방 행정의 치소성과 조선 시대에 실록(實錄)을 보관하기 위한 성이 확인되고 있다.
[백제 적천현의 치소성 주계 고성]
백제 영역이었던 현재의 무주군 무주읍 지역에 적천현이 설치되었으며, 주계 고성(朱溪古城)은 적천현의 치소지라 할 수 있듯이 성 내부에서 백제 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 등이 확인되고 있다. 적천현은 삼국이 통일된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단천현(丹川縣)으로 고치어 지금의 금산 지역인 진례군(進禮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시대인 940년(태조 23)에 단천현을 주계현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때의 현 이름을 따 주계 고성으로 불리고 있다. 주계현은 조선 시대의 군현제(郡縣制) 개편에 따라 1414년에 무주현이 되었는데, 계속해서 그 치소를 주계에 두어 주계 고성은 삼국 시대부터 줄곧 지방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주계 고성은 다른 고성(古城)과 달리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성이란 옛날에 쌓은 성으로 특히 삼국 시대에 축성되었던 성을 가리킨다. 주계 고성은 백제 고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백제에 의해 처음으로 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전해져 오는 성 관련 지명만 일부 남아 있는데, '성안', '동헌 터'가 그것이다. 동헌 터는 성 내부 중 지대가 낮고 넓은 평탄지가 있는 남쪽 지점에 해당한다. 동헌은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 중 현령 등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무주현의 관청이 주계 고성 내에 자리하였던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듯 주계 고성은 조선 시대까지도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문헌상에서는 '고성'으로 기재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주계 고성의 둘레는 1㎞ 정도이고 3개의 봉우리와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包谷式)의 석성이다. 성벽은 주로 남쪽과 동쪽에서 확인되며, 성벽 위에는 토루(土壘)가 형성되어 있다. 성문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소씩 있다고 추정되며, 서쪽의 성문 부근은 지대가 낮고 넓으며 출입도 용이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정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외에 성 내부 시설로는 우물 터가 있다. 성 내부에서는 백제 시대 토기편 및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계 고성의 서쪽은 군부대와 접해 있으며, 북쪽은 예비군 훈련장, 남쪽은 민가(民家)와 민묘(民墓)의 조성, 그리고 경작 활동 등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어 이를 방지하고 조속히 학술 조사를 실시하여 명확하게 성격을 밝혀야 할 것이다.
[신라 무산현의 치소성 무풍 고성]
신라의 영역이었던 현재의 무주군 무풍면은 무산현이었고, 무풍 고성(茂豊古城)은 당시 현의 치소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에 무산현에서 무풍현으로 고쳐 경상북도 김천으로 비정되는 개령군(開寧郡)의 영현으로 되면서 지금의 명칭이 생겼다. 이후 고려 시대인 1018년(현종 9)에는 주계현과 무풍현을 모두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으로 비정되는 진례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주계현을 병합하여 무주현이라고 하였고, 1414년에 군현제 개편에 따라 무주현을 주계에 둔 이후 성의 운영은 지속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인해 지금은 성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의 문헌 기록을 참고하면, 무풍 고성은 고성으로 석축하였고, 둘레는 160.91m[531척], 높이는 1.52m[5척]이며, 15세기 후반까지는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다가 20세기 초 이전에는 폐성(廢城)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헌의 기록상에서도 무풍현이 무주현으로 개편 또는 병합되면서 지방 행정의 중심지가 이전됨에 따라 무풍성의 운영이 더 이상 어려웠고, 잠시나마 창고로 활용되었다가 폐성이 되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풍현이 없어짐으로써 점차 성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다. 다만 민가가 조성될 만한 공간, 즉 평지를 이루고 있었던 점에서 무풍 고성은 평지에 축성된 평지성일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보루로 추정되는 노고성과 성현석성]
보루(堡壘)란 둘레가 300m 이하의 작은 성을 말한다. 적군을 막거나 공격하기 위해 흙이나 돌로 튼튼하게 쌓아 놓은 진지(陣地)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로, 적의 이동 상황 등을 관찰하기에 용이하도록 주변보다 높은 구릉이나 산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보루성이라고도 한다. 서울 아차산(峨嵯山) 일원의 고구려 보루들은 일정 간격을 두고 산 정상부에 위치하여 군사 정보를 전달하거나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한다. 무주 지역의 보루는 주변을 관찰하거나 길목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고성(老姑城)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한 아들의 무운을 빌기 위해 쌓았다는 구전이 있다. 노고단(老姑壇)처럼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도 추측되지만 사방이 잘 보이는 고지에 있고 특히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대인 점에서 볼 때 보루일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성현석성(城峴石城)은 무풍 지역에서 김천 지역 방면을 잇는 길목의 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의 관측이 매우 용이하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利點)을 가지고 국경 지대에 축조된 소규모의 관방 시설은 보루적인 성격이 짙다고 판단된다.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적상산성]
적상산성은 무주군 무주읍에서 남쪽으로 국도 제19호선을 따라 10㎞ 정도 가면 있는 적상면 소재지 동쪽의 적상산(赤裳山)에 자리한다. 적상산성은 고려 말 도통사(都統使) 최영이 산성을 세우고 창고를 설치하여 불우(不虞)의 변에 대비하고자 요청하여, 1612년(광해군 4)에 실록전(實錄殿)이, 1614년(광해군 6)에 사각(史閣)이 세워졌다. 이후 1633년(인조 11)에 평안북도 묘향산 사고(妙香山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 옮겨졌고, 1641년(인조 19)에 선원전(璿源殿)을 세워 그해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였다. 이처럼 실록전과 선원전을 비롯하여 산성의 수호 보강책으로 1639년(인조 17)에 산성을 수축하였고, 1712년(숙종 38)에도 수축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양각(兩閣)과 산성의 수호 대책으로 성내에 안국사(安國寺), 호국사(護國寺) 등의 많은 사찰과 승장(僧將)을 두었다. 1864년(고종 1)에는 안국사와 호국사가 남아 있었으나 1949년에 호국사마저 소실되어 지금은 안국사만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지조(城址條)에 의하면, "적상산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만 6920척[5.13㎞], 높이가 7척[2.12m]이며, 이제는 폐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성내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고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 있었다고 한다. 『문헌비고』 성곽조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둘레가 4,928보라고 적혀 있다. 1979년에 실제로 측량한 산성의 둘레는 8,143m로 문헌상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적상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무주현 적상산성 수진 성책(茂朱縣赤裳山城條陳成冊)』[1632년]의 기록에 의하면 동문 2층 1칸과 서문 2층 3칸, 남문 1칸, 북문 2층 3칸 등이 전부 무너져 형태가 없어졌다 한다. 4개의 성문 중 북문과 서문으로만 왕래를 할 수 있었고, 나머지 성문은 층암절벽 틈 사이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적상산성의 성벽은 험준한 계곡과 능선상에 두루 걸쳐 있지만 대부분 무너지고 약 3㎞ 정도만 성벽의 형체가 남아 있다. 성벽은 길이 15㎝~30㎝의 장방형 자연 할석을 수평으로 쌓았다.
[무주 지역 성곽의 특징과 의의]
무주 지역의 성곽 중 삼국 시대에 초축된 주계 고성과 무풍 고성은 백제 적천현과 신라 무산현의 치소지로 지방 행정을 관할하였던 곳으로 판단되며, 지금의 유적 이름은 각각 고려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 고쳐진 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시대 무풍현은 주계현과 합쳐져 무주현을 이루었는데, 그 치소는 주계 고성에 둔 것으로 보인다. 무풍현은 이후 무너지고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주계 고성과 무풍 고성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방 행정을 보는 관아로서 지속적으로 영위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또한 삼국 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는 지역인 만큼 교통의 편의 및 주변을 관망하기에 유리한 지점에 보루를 축성하였던 점도 눈에 띈다. 한편 적상산성은 『조선왕조실록』이 봉안된 사고를 보호하려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축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