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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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濟通門 |
영어공식명칭 | Najetongmun |
이칭/별칭 | 라제통문,통일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383-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철배 |
현 소재지 | 나제통문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3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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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통문|관방 유적 |
양식 | 동굴 |
크기(높이,길이,둘레) | 3m[높이]|10m[길이]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석굴 문.
[개설]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 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모산(石絹山)에 위치한 바위 굴이다. 무주군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 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는 말에 따라 ‘나제통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삼국은 통일 전쟁 무렵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通一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 마을인 무주군 무풍면 방면의 이남 마을과 무주읍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 행정 구역으로는 모두 설천면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풍속과 전통이 각기 다르게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건립 경위]
나제통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삼국 시대 당시 조성된 것은 아니고, 근대 일제 강점기에 무주 지역에서 김천 지역과 거창 지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내면서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굴을 뚫은 것이라고 한다. 즉, 석견산 능선으로 일찍부터 설천 지역과 무풍 지역을 오가던 사람들이 다니던 고갯길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를 대신하여 굴을 뚫어 신작로를 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제통문 주변에 전하는 전설은 이곳이 여전히 관방 유적으로서 기능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부근의 야산에 산재한 약 300여 기의 고분은 신라와 백제 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파리소(沼)라는 연못은 양국의 격전 시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인근의 무산성(茂山城) 터 근방 사선암(四仙巖)이라는 크고 평평한 바위는 김유신 등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며 놀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무주군 설천면 지역이 신라·백제 양국의 전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위치]
나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위치한다. 무주 구천동 입구 삼공 삼거리에서 무주읍으로 난 국도 제37호선을 따라 15.8㎞ 가면 나제통문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나제통문 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 김천시로 난 국도 제30호선을 따라 약 50m 더 가 설천교를 건너면 나제통문이 나온다.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 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 동굴로서,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 지점에 해당한다.
[현황]
덕유산 국립 공원 경역(境域) 안에 속하며 무주 구천동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나제통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무주 구천동 33경 중 1경에 해당하며, 무주군 무주읍 무주 공용 버스 터미널에서 무주 구천동을 오가는 버스를 타면 1시간 정도 후에 나제통문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유신이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과 무산성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제통문은 삼국 시대가 아닌 후대에 역사적 의미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 시대에는 석견산 바위 능선을 경계로 동쪽의 무풍 지역은 신라 땅이었고, 서쪽의 설천 지역과 적상 지역, 무주 지역 등은 백제 땅이었다. 이렇듯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지금도 각기 다른 언어와 풍습 등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어, 설천 장날에 가 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읍 사람과 무풍면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소통의 상징적 유적으로서의 나제통문의 역할을 읽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