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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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奉寄白良叔抱川閒居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흥모 |
[정의]
조선 후기 이덕무가 포천에 살고 있는 친구 백동좌에게 보낸 한시.
[개설]
「봉기백양숙포천한거(奉寄白良叔抱川閒居)」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4년(영조 40)까지 7년 사이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그의 벗이자 처남인 영숙(永叔) 백동수(白東脩)[1743~1816]의 사촌 형제로서 포천에 살고 있는 양숙(良叔) 백동좌(白東佐)에게 보낸 한시이다. 이덕무는 박학한 학자이자 동시에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와 더불어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 중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봉기백양숙포천한거」는 저자인 이덕무가 대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시를 엮은 『영처시고(嬰處詩稿)』에 수록되어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卷) 2에 실려 있다.
[내용]
해내여군소(海內如君少)[이 세상에 그대 같은 이 적어]
론교각망형(論交却忘形)[한번 사귀면 문득 너와 나를 잊어버린다]
규반수표관(窺斑羞豹管)[대롱으로 표범 엿보는 것 부끄러워하고]
주률득우령(鑄律得牛鈴)[음률을 만드는 데는 소 방울을 얻기도 한지라]
위시동성기(爲是同聲氣)[이러한 성기가 서로 같기 때문에]
종간적성령(終看適性靈)[마침내 성령에 맞는 것을 보았네]
화여청묘슬(和如淸廟瑟)[화평하기는 청묘의 비파 소리 같고]
기내욕반명(奇迺浴盤銘)[새롭기는 바로 반명이라]
형벽유장박(荊璧猶藏璞)[형산의 옥은 아직도 박 속에 감추어졌고]
포도이발형(庖刀已發硎)[푸줏간 칼 이미 숫돌에 갈았다오]
모재련야설(茅齋聯夜雪)[띠집 눈 오는 밤에 같이 놀고]
련택숙춘성(蓮澤宿春星)[연못가 봄 별빛 아래 함께 자기도]
차립평생서(車笠平生誓)[그대는 수레 나는 삿갓 한평생 맹세하고]
규잠진일청(規箴盡日聽)[착한 말 좋은 행실 온종일 들어가며]
언시차귀기(言詩嗟鬼忌)[시를 말하면서 귀신의 시기함을 슬퍼하고]
관사질천형(觀史質天刑)[역사를 읽고는 하늘의 형벌 증거 삼으며]
염염천도탈(冉冉天弢脫)[재빨리 속세의 테두리 벗어나고]
소소지뢰령(翛翛地籟聆)[시원스레 지뢰 소리 들으며]
시림청리첩(時臨靑李帖)[때로는 청리의 필첩 보고]
상대묵매병(相對墨梅屛)[서로 묵매의 병풍 대하기도 하고]
로복조분전(爐馥朝焚篆)[아침에는 화로에 향불 피우고]
서명야취형(書明夜聚螢)[밤이면 반딧불 모아 글 읽었건만]
천공다희극(天公多戲劇)[하느님이 희극이 많아]
오우익표령(吾友益飄零)[우리 벗들 뿔뿔이 흩어져라]
두로음시수(杜老吟詩瘦)[두보는 시 읊느라 파리하고]
순군좌처형(荀君坐處馨)[순욱(筍彧)은 앉은 자리가 향기로워]
매산료피속(買山聊避俗)[산을 사서 속세를 피하려 하고]
복약욕연령(服藥欲延齡)[약을 마시고는 수명을 더하려 하기도]
적견수령기(赤犬隨靈杞)[붉은 개는 신령스런 구기자에 따르고]
청우와로령(靑牛臥老苓)[청우(靑牛)는 늙은 복령에 누워 있어]
지홍심이원(指鴻心已遠)[기러기만 쳐다보아도 마음이 멀고]
만록거무정(挽鹿去無停)[사슴을 붙들려다 한없이 따라가며]
포옹관신정(抱甕灌新井)[항아리 끼고 샘물 나르고]
하서착록경(荷鋤斲綠坰)[호미 메고 푸른 언덕 쪼으며]
허명생백실(虛明生白室)[빈 방에 훤한 빛이 들 때에는]
소쇄초현정(瀟灑草玄亭)[맑고 깨끗한 마음으로『태현경(太玄經)』을 초하기도 하며]
이성관한야(怡性寬閒野)[한가한 초야에서 성정(性情) 기르고]
회심저작정(灰心著作庭)[글 쓰는 데에도 마음 없어라]
타년오역은(他年吾亦隱)[언젠가는 나도 숨어 버릴 테니]
불필탄부평(不必歎浮萍)[부평 같은 신세 구태여 한탄하지 않는다오]
[의의와 평가]
이덕무는 백동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이덕무의 시집 『영처시고』에 백동좌에게 보내는 시가 8편이나 남아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덕무는 백동좌에게 보내는 시 가운데 백동좌와의 우정을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사귐[백아절현(伯牙絶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봉기백양숙포천한거」[포천에서 한가하게 집에 있는 백양숙에게 보냄]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창작 당시 백동좌는 포천에 살고 있었다. 1953년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포천의 동교리[현재 경기도 포천시 동교동]에는 350년 동안 이어진 수원 백씨(水原白氏)의 집성촌이 존재하여 이덕무의 처가인 수원 백씨와 포천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