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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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抱川齋供風樹菴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포천재공풍수암」 저자 이호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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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포천재공풍수암」 저자 이호민 사망 |
성격 | 한시 |
작가 | 이호민 |
[정의]
조선 중기 이호민이 포천의 풍수암에 공양하고 준법사에게 준 칠언 고시의 한시.
[개설]
「포천재공풍수암(抱川齋供風樹菴)」은 조선 중기의 문신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포천의 풍수암(風樹菴)에 공양하고 준법사(俊法師)에게 준 한시이다.
이호민은 자가 효언(孝彦)이고, 호는 오봉, 남곽(南郭), 수와(睡窩)라 했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시호는 문희(文僖)로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문인이다. 이항복(李恒福)[1556~1618] 등과 교유했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장원하고, 1584(선조 17) 대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사가독서했다. 문신 정시(廷試)에서 두 차례 1등을 하고, 이후 응제(應製) 때마다 수석을 차지했다. 1596년(선조 29) 대사간을 거쳐 대사헌, 예조 판서, 도승지, 대제학을 지내고,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이 되었다.
「포천재공풍수암」은 이호민의 문집 『오봉선생집(五峯先生集)』 권(卷) 6의 시(詩)에 실려 있다. 『오봉선생집』은 원집 15권과 부록 합 8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 1~6은 1,000여 수의 시가 각 시체별로 나뉘어 실려 있다.
[내용]
준재백운사리유(俊在白雲寺裏遊)[준법사가 백운사에 머물며 노니니]
전년종아래화구(前年從我來花丘)[작년에도 이 꽃동산에 왔었네.]
화구정사비신취(花丘精舍比新就)[꽃동산의 암자, 새로 지은 절에 견줄까.]
단벽림창계수류(丹壁臨牕溪水流)[붉은 담장에 난 창에 시냇물이 흐르네.]
산비백운수소천(山比白雲雖少淺)[산은 흰 구름보다 낮고]
화구역의현등유(花丘亦倚懸燈幽)[꽃동산도 그윽한 등불만큼 찬란하지 않네.]
아래신춘감우로(我來新春感雨露)[여기 와서 새봄의 비와 이슬에 감응(感應)하니]
곡풍류류송생조(谷風瀏瀏松笙稠)[골짜기의 바람은 넘실넘실, 빽빽한 소나무.]
왕손유작미귀인(王孫猶作未歸人)[왕손은 아직 돌아가지 못하는데]
처처방초동서주(萋萋芳草東西疇)[무성한 수풀만이 동서의 두둑 길을 뒤덮었네.]
심계계진주공사(尋溪溪盡柱筇思)[시냇가에서 지팡이 만들 나무를 찾고]
조물왕왕진차모(造物往往眞差謀)[신(神)은 이따금 진실로 괴이한 재주를 부리니]
일래무왕하해구(一來無往何害久)[한 번 와서 돌아가지 못하는 해(害)가 얼마나 오래갈까.]
당당왕래여경구(幢幢往來如驚漚)[갔다가 왔다가 하는 모양이 물새와 같구나.]
신인수불래(新人雖不來)[새 사람은 오지 않더라도]
구인여장류(舊人如長留)[옛 사람은 오래 머무르네.]
사원장기단(巳猿膓豈斷)[원숭이의 창자를 어찌 끊으리오.]
야오제응휴(夜烏啼應休)[깊은 밤 까마귀 울어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오.]
천도여하불여차(天道如何不如此)[천도(天道)는 어찌하여 이와 같지 않은가.]
사아수사공산두(使我愁死空山頭)[깊은 슬픔에 빠져 적막한 산에 있는 듯하네.]
제시불각어군심(題詩不覺語君深)[시를 지어도 그대의 깊음을 깨닫지 못하니]
아의량고군휴우(我意良苦君休尤)[그대여. 나의 괴로움을 저어마오.]
* 사원장기단(巳猿膓豈斷): 진(晉)나라 사람이 산에 들어가서 새끼 원숭이를 잡아 와 나무에 묶어 두었다가 마침내는 죽이고 말았다. 어미 원숭이가 그 나무 위에서 계속 하소연하며 슬피 울다가 끝내는 나무 위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어미의 배를 가르고 보니, 애가 마디마디 끊겨져 있더라[腸皆寸寸斷]고 하는 고사가 전한다[『世說新語』, 黜免].
[특징]
포천의 백운산에 있는 백운사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나 사암(思庵) 박순(朴淳)[1523~1589]을 비롯하여 포천을 찾는 시인 묵객들이 다투어 찾았던 곳인 듯하다. 「포천재공풍수암」 2행으로 보아 이호민도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속을 떠나 불도를 닦는 준법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포천재공풍수암」은 주변 경물의 묘사와 적절한 고사의 활용, 은근히 상대를 올리는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1589~1670]는 『오봉선생집』 권수의 「서문(序文)」에서, 이호민은 전인의 자취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기축을 개척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하고 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은 「발문」에서, 이호민의 글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진언(陳言)을 극히 꺼려 독창적인 격조 속에 평담(平淡)한 생각을 담은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하였다. 「포천재공풍수암」도 작자 이호민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