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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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弓裔-鳴聲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이원용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0년 - 「궁예와 명성산」『포천의 설화』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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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0년 09월 22일 - 「궁예와 명성산」 이병찬이 이현문에게 채록 |
관련 지명 | 명성산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
채록지 | 「궁예와 명성산」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
성격 | 인물담|산소 유래담|교훈담 |
주요 등장 인물 | 궁예|왕건의 군사 |
모티프 유형 | 궁예의 죽음|무덤의 유래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궁예(弓裔)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궁예와 명성산」은 울음산에서 최후를 마쳤다는 인물담이고, 죽음을 맞이한 궁예[?~918]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곳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는 산소 유래담이다. 궁예는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인물로, 아버지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875] 아니면 헌강왕(憲康王)[?~886]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라고 한다.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일대에 궁예산성이 전하고, 그의 패주와 죽음에 대한 설화가 서너 편이 채록되어 있다. 「궁예왕」, 「궁예왕 이야기」 등도 궁예와 관련된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2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발행한 『포천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2000년 9월 22일 이병찬이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이현문[남, 70]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전투를 할 때,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짓고 대전하였다. 왕건이 반년간이나 치열하게 공격을 해서 결국 궁예가 현등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철원에 궁예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 옆에 ‘삼방역’이라는 조그마한 역이 있다. 그 역 앞에는 돌담이 하나 있고, 그것이 바로 궁예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현등산 옆에 울음산[명성산]이 있다. 그 산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삼방역 앞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가 거기서 우뚝 서 있으니, 왕건의 군사들이 활을 계속 쏴서 궁예의 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쓰러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가까이 가 보자 죽긴 죽었는데, 아무리 발로 차고 떠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돌을 쌓아서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궁예의 무덤’이다.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돌을 쌓아서 만든 것이 궁예의 무덤이라는 유래담이다.
[모티프 분석]
「궁예와 명성산」의 주요 모티프는 ‘궁예의 죽음’, ‘무덤의 유래’ 등이다. 「궁예와 명성산」은 왕건(王建)[877~943]에게 패한 궁예가 통곡했다는 명성산(鳴聲山)[울음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궁예의 비참한 인물담이다. 특히 악정(惡政)을 펼쳤던 궁예가 권좌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교훈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