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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872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서길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사지 절터 - 경상북도 영천시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사찰로 운영되었으나 현재 폐사되고 그 흔적만 있는 터.

[개설]

절터는 과거에 사찰이 존재했으나 세월이 흘러 절이 폐사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는 터로, 대게 탑재(塔材)나 석등(石燈) 등의 석조물이 남아 있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고대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그리고 고려 시대까지 점차 사찰의 수가 증가되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숭유 억불 정책에 따라 많은 절이 인위적으로 훼철되었다.

폐사된 이유는, 인위적인 훼철도 있지만 관리자의 궁핍한 자금 사정으로 운영의 유지가 되지 못해 승려 등의 관리자가 절을 떠나는 경우, 화재 또는 홍수로 인해 자연적 재난에 따른 것, 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대한제국 말 외세에 의한 침략,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한 유물 등의 강제 점유, 한국전쟁의 폭격 등으로 인한 폐사의 이유 등이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유적은 대부분 목조 건축물이다. 목조 건축물은 습기와 화재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자칫 관리가 허술해지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폐사된 절터에는 불과 습기에 영향을 잘 받지 않는 주춧돌·석등·석탑재·기단석·축대, 그리고 석확(石鑊)[물을 담는 용도의 석조물] 등의 석재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석조물은 대부분 주변의 사찰에서 가져가 재사용하거나, 조선 시대의 향교나 서원 등 유교 건축에 재사용되거나, 관용 건물인 객사·관아·읍성 및 산성 내 건축물에 사용하는 경우, 조선 시대와 근현대에 개인의 민가에서 재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또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목조 건물의 부재를 뜯어 와 관용 건물 등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폐사된 절터는 한국전쟁 때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과정과 나라가 경제적 궁핍한 시기를 거치면서 땅속으로 묻히게 된다. 대개 절은 산 중턱이나 깊은 산곡에 위치하여 토양의 퇴적이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과 몇십 년 만에 절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근대와 현대의 1980년대 정도까지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높은 산 사면과 계곡 근처까지 논과 밭을 개간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이때 절터를 밭으로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절터에 남아 있던 석조 유물 등이 땅속에서 하나둘 드러나게 되고, 일부는 개간에 의해 철거되면서 그 흔적마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폐사되어 땅속에 묻힌 절터를 문화재청을 비롯해 불교 단체, 지자체 등에서 되찾는 시도가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며, 대부분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나 각 지방 읍지 등의 고문헌 및 고지도에 현재 존재하지 않는 사찰명이 많이 확인되고, 학계를 비롯한 문화재 조사 기관, 각 지자체의 향토 문화 단체 등에서 고문헌 조사와 끈질긴 현장 조사 결과로 폐사된 절터가 확인되는 경우이다.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절터를 보면, 경상북도 경주의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와 황룡사지(皇龍寺址),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충청남도 부여의 왕궁리 사지(王宮里寺址), 경기도 여주의 고달사지(高達寺址), 양주의 회암사지(檜巖寺址) 등이 있다. 이런 절터에서 발굴된 성과로 문헌 기록으로만 알려졌던 것이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확인되고 귀중한 유물 등이 세상에 드러나는 성과를 올려 사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내용]

영천 지역에서도 고문헌과 주민들의 증언, 지명 등에서 확인된 사명과 현재 잔존하지 않는 사찰이 많이 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은 정각리 절터·공덕리 절터·법화리 절터·신원리 절터·왕산리 절터·화남리 절터 등이다.

1. 문헌에 나타난 절터

영천에서 고문헌을 통해 확인되는 사명은 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와 『영양지(永陽誌)』·『익양지(益陽誌)』·『화산지(花山誌)』·『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의 읍지에서 대부분 확인된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천군신녕현으로 분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신녕현조에는 부귀사(富貴寺) 외에는 찾아볼 수 없고, 영천군조에 정각사(鼎脚寺)·공덕사(功德寺)·백지사(栢旨寺)·거조사(居祖寺)[거조암(居祖菴)]·은해성(銀海城)[은해사(銀海寺)]·원명사(圓明寺)·안흥사(安興寺)[기기암(寄寄菴)]·상원사(上元寺)·죽방사(竹坊寺)·부귀사(富貴寺) 등 열한 개의 사명이 확인된다. 이 중 정각사·공덕사·백지사·원명사·상원사·죽방사 등 여섯 개는 현재 잔존하지 않는다.

『영양지』 불우(佛宇)편에서는 은해사·백흥암·서운암·기기암[안흥사거조암·백련암·운부암·상용암·충효암[충효사중암암·영지사·죽림사·묘각사·거동사·선흥사·정각사·삼귀암·수도사·진불암·부귀사·불굴사·법화사·봉림암[봉림사]·정수암 등 스물네 개의 사찰과 암자명이 나온다. 이 중 선흥사·삼귀암·법화사·정수암은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불굴사는 경산시 와촌면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익양지』 불우(佛宇)편에는 『영양지』에 수록된 것 외에 백운암·묘봉사[묘봉암]·죽방사가 추가로 있지만, 전체적으로 스물두 개의 사찰과 암자명이 나온다. 특히 『영양지』에는 거조암·정수암·봉림암으로 나오지만, 『익양지』에서는 암(菴)이 사(寺)로 표현되어 있다.

영천시 신녕면의 옛 지명인 『화산지』에는 수도사·진불암·부귀사·불굴사·법화사·봉림암[봉림사]·정수암 등 일곱 개의 사명이 나오는데, 특히 법화사와 정수암은 ‘금폐(今廢)’라고 적고 있어 폐사된 것을 알 수 있고, 불굴사는 현재 경산시 와촌면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조선환여승람』에도 사명이 나오지만, 앞의 『영양지』 등에 모두 수록된 것이다.

이상 문헌을 통해 모두 서른한 개의 사명이 확인되는데, 이 중 불굴사는 행정구역이 영천시 신녕면에서 경산시 와촌면으로 변경되어 이것을 제외하면 총 서른 개의 사명이 확인되는 셈이다.

고문헌에 기록된 영천 지역 서른 개의 사명 중 현재 절이 유지되고 있는 곳은 부귀사·은해사[은해성]·거조사[거조암기기암[안흥사백흥암·서운암·백련암·운부암·충효사·수도사·진불암·중암암·봉림사[봉림암]·영지사·죽림사·묘각사·거동사 등 열일곱 개이다. 이 외에 정각사·공덕사·백지사·원명사·상원사·죽방사·상용암·선흥사·삼귀암·법화사·정수암·묘봉암·백운암 등 열세 개 사찰은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2.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절터

문헌을 통해 영천 지역의 열세 개 폐사지가 확인되었지만 이것을 모두 신뢰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려지거나 사명이 변경된 경우, 기록자의 오기 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천 지역에서 현재까지 유적과 유물을 통해 폐사지임을 추측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국가 지정 및 지방 지정으로 지정된 불교 유물이 확인된 것은 임고면 선원리 철불좌상, 금호읍 신월리 삼층석탑, 신녕면 화남리 동·서 삼층석탑과 불상, 화북면 정각리 삼층석탑공덕리 삼층석탑 등으로 5개소에 불과하다. 이 5개소의 불적은 사찰의 주요 유물인 만큼 분명히 그 인근에 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2001년 발간된 『문화유적분포지도-영천시』에는 대창면 용호리 사지, 신녕면 왕산리 절터, 화북면 법화리 절터, 공덕리 절터, 정각리 절터가 조사된 바 있는데, 이 중 공덕리정각리 절터는 앞서 탑의 존재로 이미 절터가 확인된 곳이다.

또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조선보물고적조사보고서』에는 팔공산(八公山) 수도사 상부 진불암곡에 삼존석굴이 조사된 바 있는데, 이 석굴 내의 석불은 현재 사라진 상태이지만, 주변의 사찰 관련 유물이 곳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가 절터임을 알 수 있는데, 망정동 미륵불, 금호읍 대미리 석불좌상, 대창면 대재리 미륵불, 신녕면 화서리 미륵불, 임고면 수성리 미륵불, 효리 쌍석불, 자양면 충효리 석불좌상이 그 예이다.

이상 문헌의 13개소의 폐사지와 유적과 유물을 통해 절터임을 알 수 있는 곳은 16개소이다. 문헌에서 확인된 절터 중 화북면 정각리의 정각사, 공덕리 공덕사, 법화사는 사명과 위치가 확인되었지만, 나머지 10개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신녕면 화남리 석불좌상과 동·서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현재 한광사(閑曠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고, 금호읍 신원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 역시 신흥사(新興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으며, 팔공산묘봉암에도 석탑이 있었으나 근래에 석탑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현재는 법당과 산령각이 신축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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