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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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七星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칠성이란 이름은 흑석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 대구광역시에도 칠성리가 있는데, 고인돌 유적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일러 칠성리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칠성이나 흑석을 옛 선조들은 ‘별똥’이라고도 불렀다.
칠성리는 본동인 칠성동과 향인촌, 대밭골, 월곡을 합한 마을이다. 칠성리 본동에는 길가와 마을 안 개인의 집까지 칠성 바위인 고인돌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원래 칠성동은 조들 또는 질매끝과 월곡이라고 불린다. 오산(鰲山)[남산]에서 줄기차게 내려온 갈마봉을 옛 기록에는 주마분등형이라고 적고 있다. 달리는 말에 질마를 지운 끝 부분이 질매끝인데, 이러한 모습을 일러 칠성리 본동을 ‘질매끝’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부근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동쪽에 형성된 곳은 화양읍 서상 2리이고, 서쪽에 자리 잡은 곳은 각남면 칠성리이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 마역리(麻亦里)였다가, 내서면(內西面) 칠성리(七星里)로 바뀌었다.
향인촌(向仁村)은 사인촌(舍人村) 또는 샌촌이라고도 부른다. 향인촌에는 사통정(四通政) 이라는 말이 있고 사인(舍人)은 신라 때의 벼슬의 이름이다. 그러나 누가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샌촌은 사인촌이 변음된 것이다.
죽촌(竹村)은 향인촌 북쪽 개울 건너에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은 감나무 밭으로 변해 있는데 오래된 우물이 있고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이 우물은 극심한 가뭄과 긴 장마에도 수량이 변함이 없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내서면 지역으로 6곳의 자연 마을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칠성동이라는 이름으로 한 마을이 되어 각남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칠성동에서 칠성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칠성리는 오산에서 내려온 등줄기의 가장 짧은 골이다. 남쪽은 오산이 높이 막아 주어 태풍의 피해를 막아 주고 북쪽은 한내천[청도천]이 가로 지르고 있지만, 한내천으로 인해 얻은 혜택은 별로 없었던 마을이다. 마을 앞 둑안들과 조들, 새들은 토질이 충적토로 형성되었고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한내천이 범람을 하면 홍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오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인 칠성천은 경사면이 급하고 얕은 건도랑이라 곧바로 흘러내려 큰 비가 오면 흙과 모래가 많이 따라 흐르기도 하는 곳이다. 비교적 넓은 면적의 경작지를 이루고 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곳은 밭으로 변화시켜 과수 영농을 많이 한다. 국도 20호선 변은 가을이면 대부분 논에 양파 재배를 하여 다음해 6월에 수확을 하고 벼를 심는 2모작을 하고 있다.
[현황]
2012년을 8월 현재 면적은 3.74㎢이고, 총 160가구에 361명[남자 172명, 여자 18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화양읍 신봉리·서상리, 서쪽은 각남면 화리, 남쪽은 각남면 사리, 북쪽은 이서면 서원리·화양읍 토평리·유등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칠성 1리와 칠성 2리가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칠성동과 향인촌, 대밭골, 월곡이 있다.
애목 고개를 넘어 화양읍 신봉리로 가는 길이 예전부터 관로로 형성되어 오다가 신작로가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거의 폐로(閉路)가 되다시피 했는데, 최근에 확장과 포장을 해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고 있다. 풍각면을 거쳐 경상남도 창녕군으로 가는 국도 20호선이 칠성리 북쪽을 동서로 지난다.
각남면과 이서면, 화양면을 잇는 삼거리인 칠성리는 농업 협동조합 공판장이 설치되어 해마다 수확되는 과일이 이곳에서 모여 경매에 의해 출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