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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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梅田面南陽-里鬪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9년 5월 25일 - 매전면 남양 2리 투쟁, 청도군 매전면 남양 2리 주민들에 대한 빨치산 보복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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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49년 음력 4월 28일 - 매전면 남양 2리 투쟁, 민보단 청년들이 빨치산 1명 생포 |
성격 | 빨치산 보복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민보단 |
[정의]
1949년 음력 4월 28일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남양 2리 주민들에 대한 빨치산 보복 사건.
[개설]
해방 정국과 6·25 전쟁 기간 중 청도군에서는 좌·우익 사이 여러 가지 충돌 사건들이 발생했다. 매전면 남양 2리 투쟁도 그 사건 중 하나로 빨치산을 생포한 주민들을 상대로 빨치산이 보복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은 북부의 용각산(龍角山), 선의산(仙義山), 남부의 운문산(雲門山)에 둘러싸인 산촌 지역이기 때문에 농토가 적은 산간 촌락이 많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매전면은 운문면과 더불어 해방 후 빨치산들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민보단(民保團)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마을 및 지서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청도군에서 민보단의 실제 활동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바로 매전면 남양 2리 투쟁이다.
[경과]
1949년 음력 4월 28일 남양 2리 주민들은 마을 뒷산에 수상한 사람 1명[허동락]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마을의 민보단 소속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생포한 후 매전 지서에 연락하여 경찰에게 인계하였다. 이 날 생포 작전에는 마을 민보단장[박순형], 구장[이장], 반장 등을 포함한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동원되었다.
1949년 5월 25일 밤 11시경 빨치산 생포 작전에 공로가 컸던 마을 주민들을 포상한다는 명분으로 10여 명의 국군 복장을 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들어 왔다. 이들은 당시 생포 작전에 참여했던 주민 모두를 동사(洞舍)에 소집시켰다. 빨치산들은 동 사에 집결해 있던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과 칼로 공격하여 남양 2리 주민 7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해 대구 도립 병원으로 이송했다.
[결과]
매전면 남양 2리 투쟁 의 소문은 청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빨치산에 대한 지역민들의 거부감 및 공포감도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빨치산의 횡포로 말미암아 젊은 남자들은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숙식해야 했다. 특히 경찰과 공무원, 이장 등은 청도읍과 같은 군내 중심지에서 숙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