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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보도 연맹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500
한자 國民保導聯盟事件
이칭/별칭 보도 연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국민 보도 연맹 사건 예비 검속이 실시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 국민 보도 연맹 사건 국민 보도 연맹 가입자 청도 용각산 곰티재, 승학골, 경산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에서 집단 살해함
발생|시작 장소 국민 보도 연맹 사건 - 경상북도 청도군
성격 국민 보도 연맹 보복 사건
관련 인물/단체 국민 보도 연맹

[정의]

1950년 경상북도 청도 지역의 국민 보도 연맹 가입자에 대한 집단 살해 사건.

[개설]

국민 보도 연맹(國民保導聯盟)은 일제 강점기 친일 전향 단체인 대화숙(大和塾)을 모방하여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에 따라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보호하고 인도하는 취지로 조직되었다. 1949년 11월 1일 국민 보도 연맹 경북도 연맹 발족 이후, 산하 조직으로 청도군 연맹이 결성되어 총 2,138명이 가입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대적인 예비 검속 및 집단 구금 후 이들을 집단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역사적 배경]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에 따라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보호하고, 인도하는 취지로 국민 보도 연맹을 결성한다. 1949년 11월 1일에는 국민 보도 연맹 경북도 연맹이 발족하고, 이후 산하 조직으로 청도군 연맹이 결성되었다.

청도군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점령되지 않았으나 2·7 사건, 제6 연대 반란 사건, 10·1 사건의 영향과 험준한 지형적 이유로 6·25 전쟁 이전부터 빨치산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제3 여단 제6 연대 등이 청도 지역에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청도 경찰서 사찰계를 중심으로 비슬산운문산 일대에 대한 토벌 작전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연행되어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고, 이후 이들 중 대다수가 국민 보도 연맹 청도군 연맹원으로 가입하게 된다.

청도군 연맹 사무실은 청도읍 고수리에 위치한 간사장 양해학의 집을 사용하였고, 기관지 발행, 가입원에 대한 교육, 국가 부역 동원이 실시되었다. 위원장에는 좌익계 출신 인사, 부위원장과 각 부 책임자들은 우익계 출신 인사, 각 부의 차장은 좌익계 출신 인사가 임명되어 활동했다.

청도군 연맹 산하 조식은 읍·면 단위로 조직되었으며, 청도읍 지부·화양면 지부·이서면 지부·풍각면 지부·각북면 지부·매전면 지부·각남면 지부·금천면 지부·운문면 지부 총 1개 읍 8개 면 지부로 구성되었다.

청도군 보도 연맹원 명부에 기록된 각 지부 규모는 청도읍 지부 358명, 화양면 지부 236명, 이서면 지부 158명, 각북면 지부 293명, 각남면 지부 250명, 풍각면 지부 185면, 매전면 지부 237명, 금천면 지부 181명, 운문면 지부 240명으로 총2,138명으로 확인된다. 1950년 당시 청도군 전체 인구 11만 1663명의 약 2%에 달하는 숫자이다.

[경과]

6·25 전쟁 발발 직후 전선 후방을 교란할 소지가 있는 잠재적 적 제거 차원에서 청도군에서도 국민 보도 연맹 가입자와 빨치산에 협조 혐의가 있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 검속이 이루어졌다. 경찰, 호림 부대, CIC[8·15 해방 직후 남한에서 활동한 미군 24군단 소속 첩보 부대] 등에 의해 시작된 예비 검속은 9월 중순경까지 이어졌다. 예비 검속 방식은 각 지서에서 예비 검속 대상자 소집 명령을 하거나 군경 및 우익 청년단이 직접 방문하여 강제로 연행 또는 자진 출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연행된 국민 보도 연맹 가입자는 청도 경찰서, 청도 국민학교, 소방 창고, 김명옥 가택 등에 분산 구금 후 군경들에 의해 청도 용각산 곰티재, 승학골, 경산 평산동 폐코발트(廢코발트) 광산에서 집단 살해당했는데, 이중 곰티재에서 살해된 인원이 가장 많았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상관없던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희생을 당했다.

예비 검속과 집단 살해 지시는 내무부 장관, 치안 국장, 경북 경찰국장, 청도 경찰서장, 사찰계 및 각 지서 주임으로 하달되었고, 군경 우익 청년단과 합동으로 실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

2008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조사한 청도군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최소 586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중 국민 보도 연맹 가입원이 63명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들 희생자의 연령대는 20대 321명, 30대 177명, 40대 54명, 10대 15명, 50대 8명, 60대 2명, 70대 1명, 기타 8명 순이었다.

희생자의 거주지별 분포는 청도읍 108명, 화양면 53명, 이서면 88명, 각남면 29명, 풍각면 57명, 각북면 57명, 매전면 104명, 운문면 82명, 금천면 27명이다.

희생자의 직업별 분포는 공무원 4명, 교원 3명, 농업 540명, 상업 2명, 음식업 1명, 군인 1명, 무직 28명, 미상 7명으로 집계되었다.

[의의와 평가]

좌익 사상 교화 단체로 출범한 국민 보도 연맹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적으로 가입원에 대한 막대한 희생을 가하는데, 당시 사상과는 상관없는 사람들도 대거 포함되었다.

청도군의 경우에도 희생자들의 직업별 분포를 살펴보면 농업인이 92%로 좌익 사상에는 무지한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지역 할당제에 따른 강제적 가입 인원 늘리기의 결과이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잠재적 적 제거라는 차원에서 국민 보도 연맹원은 그 희생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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