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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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梧津里-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댐 수몰 지구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김구군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3년 7월 - 오진리 암음 유적 부산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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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오진리 암음 유적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산 72-1번지 |
성격 | 생활 유적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에 있는 선사 시대의 생활 유적.
[조사 경위]
오진리 암음 유적은 운문댐 건설과 관련하여 1991년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에서 실시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시 확인되었고, 1992년 발행된 보고서에는 ‘방음리 2호 바위 은거지’로 나타나 있다. 운문댐 수몰 지구 발굴 조사는 1993년 7월 경북 대학교 박물관을 주관 기관으로 모두 7개 기관이 참가하였으며, 오진리 유적은 부산 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를 담당하였다. 조사단에서는 발굴 조사에 앞서 지표에서 채집된 민무늬 토기 조각을 근거로 청동기 시대 유적일 가능성은 예상했지만, 입지 조건으로 볼 때 구석기 시대 문화층이 유존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상층부 일부만이 민무늬 토기를 포함하고 나머지 퇴적의 대부분이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가 나오는 층으로 확인되었다.
[위치]
유적은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산72-1로 동경 128°57′50″, 북위 35°42′31″에 해당한다. 운문천은 순지리 순늪 앞에서 동창천으로 흘러들게 되는데, 이 합수 지점에서 유적 앞까지는 물길로 3.4㎞이다. 이곳은 운문천의 하류 지역으로 하천의 너비가 100m를 넘고 유속은 완만한 편이다. 양안에는 동쪽의 부엉들과 서쪽의 먹방들, 논들, 깨들 등 저습지 성격이 강한 들판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바위 그늘은 부엉들의 서쪽 끝에서 큰골짝골[오이골]로 들어가는 초입부의 좌측에 있다.
[형태]
바위 그늘은 너비 약 20m, 높이 10∼15m에 이르는 가파른 바위 절벽에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바위는 각력질을 포함하고 있는 안산암 계통으로 수직과 수평 양방향으로 절리가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오랜 시간 동안 켜를 따라 이루어진 수평의 풍화 활동에 의해 자연적으로 암벽이 떨어져 나가 생겨난 공간을 선사인들이 바위 은거지로 이용했다고 여겨진다.
바위 그늘[岩蔭]은 자연적으로 암벽이 떨어져 나가 형성된 것으로 내부 규모는 높이 2.5m, 너비 15.5m, 깊이 3.3m 가량이다. 바위 그늘의 내부 평면 공간은 바닥 부분에서는 ‘ㄷ’자 모양이지만 위로 갈수록 동쪽과 서쪽의 공간 구조가 다른데, 동벽은 안쪽의 북벽과 거의 직각을 이루지만 서벽 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전혀 없다. 그리고 서편은 암벽이 고르지 않을 뿐 아니라 동편에 비해 아래쪽 원지형의 경사도도 급한 편이다. 바위 그늘 밑의 원지형은 남쪽으로 5m까지는 12° 내외의 완만한 경사를 가지며, 큰 바위 2개를 경계로 급경사를 이루다가 다시 평탄해지는데, 유물 포함층은 이 경사면을 따라 아래쪽으로 갈수록 두텁게 쌓여 있으며, 중심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모두 암벽에서 떨어진 큰 바위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퇴적층은 해발 141∼145m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오진리 암음 유적은 운문천의 하류에 해당하며, 늪지형 들판에 이어 바로 강가에 접해 있다. 바위 그늘 아래에는 해발 141∼145m 사이에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는데 주변의 강안 퇴적이 해발 140m 내외여서 홍수 때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황]
유물 포함층은 모두 4개 층으로 구분된다. 최상층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은 물론이고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철기 시대 후기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 통일 신라 시대의 인화문 토기, 조선 시대 자기 조각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뒤섞여 나왔으나 아래쪽 3개 층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만 집중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문화층 가운데 상층에서는 집자리[住居址] 1기와 화덕 자리[爐址] 2기가 확인되었다.
Ⅰ층: 조사 당시까지의 생활면으로 이용된 최상층이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부터 조선 시대 자기 조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유물이 섞여 있지만 주로 출토되는 것은 단면 삼각형 점토대 토기이고 이밖에 삼한 시대[와질], 삼국 시대[연질·도질]·통일 신라 시대[인화문] 토기도 출토되었다.
Ⅱ층: 신석기 시대 말기의 이중 구연 토기가 주로 출토되며, C피트에서는 이 층을 파고 주거지와 노지가 설치되어 있다.
Ⅲ층: 신석기 시대층 가운데 그 범위가 가장 넓으며,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이 이 층에서 나왔는데, 토기는 전기의 융기문 토기부터 중기의 태선 침선문 토기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것들이 섞여 나왔고, 석기로는 돌도끼와 어망추 48점이 있다.
Ⅳ층: 아래층인 적황색 염토층과 거의 평탄면을 이루고 있으며, 민무늬 토기와 조잡한 느낌의 문양이 새겨진 원시적인 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신석기 최상층인 Ⅱ층을 파고 설치되었다. 규모는 동서 370㎝, 남북 250㎝이며, 가장 깊은 곳의 깊이 100㎝ 정도이고 바닥에는 30㎝ 안팎의 편평한 냇돌을 한번 깔았다.
출토 유물 중 신석기 시대의 토기 조각은 약 2,000여 개인데 융기문, 침선문, 압인문, 단사선문, 사격자문, 점열문, 이중 구연 토기 등 다양한 문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석기는 출토된 55점 중 40여 점이 냇돌을 간단히 가공한 그물추여서 생업 경제에 어로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 조개류, 동물 뼈 등 자연 유물과 조개 팔지 1점도 출토되었다. 또한 돌화살촉 1구, 돌도끼 4구 외에 다량의 조각 석기, 이중 구연 토기 조각, 패천(貝釧), 골각기 2개, 이밖에 백합, 담치, 떡조개 등 바닷조개와 함께 동물 유체가 있다. 이 밖에 주거지 내부에 채워진 명흑갈색 부식토 층에서는 소토덩이와 민물 다슬기가 다량 섞여 나왔다.
유적의 절대 연대 자료는 Ⅱ층이 형성되고 난 이후의 시기로 한정되어 아쉬움이 크지만, 주거지의 동벽 쪽 노지에서 채취한 목탄 시료로 측정한 방사성탄소 연대는 3480±100B.P.로 나왔고, 주거지 남쪽 어깨 부분을 파괴하고 설치된 2호 노지에서 채취한 목탄 시료의 C14 연대는 2970±60B.P로 나와 신석기 시대의 하한을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유적은 현재 운문댐에 의해 수몰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오진리 유적에서는 한국 신석기 문화의 시기를 가르는 데 표식적인 유물로 취급되고 있는 조기의 융기문 토기부터 전기의 압날·압인문 토기, 중기의 태선 침선문 토기, 말기의 이중 구연 토기에 이르기까지 신석기 시대 전시기에 걸친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시문 수법에 의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융기문과 압날문은 이른 시기에 소멸되고 압인문이 감소하면서 상대적으로 침선문은 증가하는 출토 빈도를 보여 남해안 신석기 편년과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안정된 최하층[Ⅳ층]에서는 민무늬 토기와 함께 조잡한 무늬가 시문된 원시적인 토기[오진리식 토기]가 출토됨으로써 신석기 시대 조기로 설정된 융기문 토기에 앞서는 출현기 토기 자료를 낸 유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 이래 전 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 보기 드문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확인되는 바위 그늘 유적 중 하나이며, 영남 내륙 지방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서 남해안의 해안지방 신석기 문화와 관련이 깊은 유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