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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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大羽 |
이칭/별칭 | 의부,완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신대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순조가 세자일 때 세자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어 보필하였고, 경연 특진관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호조 참판을 지냈다. 시문과 서예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완구유집』이 전한다.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의부(儀夫), 호는 완구(宛丘). 우승지 신택하(申宅夏)의 손자이며, 의영고 판관(義盈庫判官) 신성(申晟)의 아들이다.
[활동 상황]
신대우(申大羽)[1735∼1809]는 1784년(정조 8)에 음보로 선공감 역(繕工監役)에 기용되어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동부 도사(東部都事)·경릉 영(敬陵令)을 거쳐 9년 동안 지방 수령을 지냈다. 1797년(정조 21) 1월 강동 현감에서 청도 군수로 승진되어 재임하다 1798년(정조 22) 1월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1799년 학문과 덕행으로 발탁되어 동궁(東宮)[뒤의 순조]을 보필하였으며, 3년 뒤에 동궁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다. 순조가 즉위한 1801년(순조 1) 우부승지에 제수되어 수년간 승지로 근무했다. 1804년 가선대부에 올라 부총관(副摠管)과 한성부 좌·우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이어 공조 참판에 제수되고, 경연 특진관으로 발탁되었다. 1807년에 동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808년에 호조 참판의 자리에 올랐다가, 1809년 성천에서 죽었다.
[학문과 저술]
젊은 시절에 이덕윤(李德胤)을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남건복(南建福)·이영익(李令翊)·이충익(李忠翊) 등과 깊이 교류하였다. 시문과 서예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완구유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