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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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瑢默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래업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의 종교인.
[개설]
박용묵(朴瑢默)[1918∼1991]은 18세 되던 1936년 만주 길림성 길림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길림 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46년 6월 16일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리의 박사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목회 생활을 시작하여 문화 교회, 대구 동신 교회, 대길 교회 등에서 40여 년간 목회를 하였다. 1974년에 조직된 ‘한국 기독교 부흥 협의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30년간 부흥사로 활동하면서 1960∼70년대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호는 영파(靈波)이다.
[활동 사항]
1918년 경상북도 청도에서 소작농을 하는 가난한 농부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소학교 2학년까지만 정식 교육을 받았다. 당시 청도읍 교회 김병호 목사가 성경 암송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 성경 통신과 과정을 권유하여 10살에 시작하여 11살에 성경 통신과 신약부와 구약부를 졸업한 후 교사 양성과를 마쳤다.
18세 되던 1936년 만주 길림성 길림 신학교에 진학하여 1939년 22세 되던 해에 동기생 두 명과 함께 길림 신학교를 제1회 졸업하였다. 1939년 이분예(李粉禮)와 양지 교회에서 의성읍 교회를 시무하던 정일영 목사 주례로 결혼을 하였다. 가을에는 부모님도 모시고 새살림을 시작하였고, 목회 실습을 하던 북창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해방 후 귀환 동포에 대한 구호 대책이 없는 것을 알고 이재민 동맹을 조직하여 귀환 동포를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미군정 학무국에서 사상 계몽 강연을 위촉받고 전국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순회 강연을 하였다. 1946년 6월 16일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리의 박사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목회 생활을 시작하여 문화 교회, 대구 동신 교회, 대길 교회 등에서 40여 년간 목회를 하였다.
1974년에 조직된 ‘한국 기독교 부흥 협의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제1회 한국 기독교 선교 대상도 받았다. 1970년대에는 한국 교회 부흥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 이 시기에 있었던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 1974년 엑스폴로 대회, 1977년 민족 복음화 성회 등을 통하여 폭발적인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 30년간 부흥사로 활동하면서 1960∼70년대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10만 명 영혼 구원의 목표를 위해 헌신하여 10만 명 전도의 꿈-마라톤 부흥사, 가족 선교회인 영파(靈波) 선교회 활동 등 1,000여 회의 부흥회를 이끌었다.
[사상과 저술]
저서로는 『사랑의 요리』[1961], 『기독교와 효도』[1965], 『불붙는 제단』[1969], 『말씀의 제단』[1972], 『성령의 폭탄』[1972], 『때를 알고 행하자』[1972], 『질그릇의 보화』[1978], 『부흥 전도 설교집』[1978], 『신애보』[1984], 『응답받는 기도』[1987], 『마태복음 강해 설교집』[1989]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제1회 한국 기독교 선교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