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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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長吉 |
영어공식명칭 | An Janggi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9월 9일 - 안장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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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안장길 해남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05월 21일 - 안장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 안장길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04월 11일 - 안장길 해남읍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출생지 | 전라도 해남현 현일면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구교리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묘역 09-1-30호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4월 11일 해남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안장길(安長吉)[1888~1919]은 1888년 9월 9일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1일 해남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어서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4월 11일에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김동훈을 비롯한 청년들은 1919년 4월 1일 지역에서 신망이 높았던 안정석(安正錫)·안유석(安儒錫)을 찾아가 만세 시위를 논의하였고, 이형춘(李亨春)·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조종운(曺鐘運)·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조종운·김흥봉·안창석·이형춘 등이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1919년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1919년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김동훈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안장길은 해남시장에서 펼쳐진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귀가하던 중 오후 4시경 해남읍 홍교(虹橋) 부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이호상(李浩相)·이양근(李良根)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안장길은 1919년 4월 1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60도(度)를 언도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묘소]
안장길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3 국립대전현충원 묘역 09-1-30호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14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장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