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722 |
---|---|
한자 | 朱永徹 |
영어공식명칭 | Ju Yeongch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9월 25일 - 주영철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04월 23일 - 주영철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02월 15일 - 주영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주영철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2-222호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20년 문내면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1885년 9월 25일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서 태어난 주영철(朱永徹)[1885~1929]은 1920년 4월 23일 문내면에서 발생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해남군의 경우 1919년 4월 6일 해남면에서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주영철은 고향인 문내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1920년 4월 22일 우수영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며 읍내로 행진하다가 학교의 훈도에게 발각되어 경찰관 주재소로 끌려가 취조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영철은 이상순(李尙順)·양성룡(梁成龍)·김종호(金宗浩)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동외리 성벽 밖에서 태극기 50여 개와 격문을 준비하였다. 주영철과 이상순·양성룡·김종호 등은 1920년 4월 23일 오후 7시경 선두리 선창가에 모여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격문을 돌렸다. 윤인섭(尹仁燮)·전유봉(田酉峰)·최이규(崔伊奎)·주봉옥(朱奉玉)·임동수(林東秀)·박기술(朴奇述)·박규성(朴圭星)·이준섭(李俊燮)·박용문(朴用文)을 비롯한 우수영보통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때 주영철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약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외리 경찰관 주재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 만세를 연호하자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일본 경찰은 문내면 병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해남면에서 무장경찰대를 출동시켜 만세 대열을 제지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 만세 대열을 해산시켰고, 시위 행렬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당시 문내면 주민들의 독립 만세 운동에 놀란 일본 경찰은 목포와 진도로부터 20여 명의 추가 인력을 파견하였고, 진해항에 있던 구축함 한 척을 우수영으로 보냈다고 한다.
주영철은 이날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5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주영철은 출옥 후에 고문으로 인한 조골 절개 수술(助骨切開手術)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1929년 2월 25일 사망하였다.
[묘소]
주영철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2-222호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주영철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