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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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強占期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Colonial Period|Chosun under the Japanese Rule Tim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윤상원 |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무주 지역 사회]
일제강점기 무주 지역의 인구는 1911년 조선인 3만 5912명, 일본인 63명, 1921년 조선인 4만 6228명, 일본인 198명, 1930년 조선인 5만 737명, 일본인 249명, 1940년 조선인 4만 7717명, 일본인 256명, 1943년 조선인 5만 1184명, 일본인 268명이었다. 조선인은 주로 농업, 목축업, 임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인은 초기에는 상업과 교통업, 공무에 종사하였으나 점차 농업과 목축업, 임업, 광업, 공업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였다.
고산에 둘러싸여 평지가 적은 무주 지역의 경지는 소수 지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1933년 말 무주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호수는 전업, 겸업을 합하여 8,413호(戶)로 총 호수의 85%를 차지하였다. 무주군 농가 1호당 평균 경지 면적은 8,727.27㎡[0.88정보]로 대부분의 농민은 빈곤에 시달렸다. 또한 소작 관습에 따라 농민은 지주에게 수확물의 50% 이상을 소작료를 지불하였다.
덕유산(德裕山), 적상산(赤裳山) 등의 삼림 지대를 배경으로 발달한 임업은 목재업, 인쇄업, 제지업 등 연관 산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1914년에는 무주군 내 약 238.02㎢[2만 4000정보]의 임지에 홋카이도 제국 대학[北海島帝國大學] 연습림이 조성되어 운영되었다. 홋카이도 제국 대학은 무주 읍내에 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파견된 교관과 학생의 연구에 도움을 주는 간수소 2곳을 신설하여 청원 경찰관을 주재시켜 지키게 하였다.
또한 무주군 적상면 삼가리를 중심으로 12구의 금광, 은광, 동광이 운영되었는데, 8구는 일본인이, 4구는 조선인이 운영하였다. 1913년 당시 무주 지역에는 무주 군청, 무주 헌병 분견소, 무풍장 헌병 출장소, 안성 헌병 출장소, 무주 우편소, 무주 지방 금융 조합, 무주 학교 조합 등의 관공서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무주 지역의 교육 기관]
일제강점기 무주 지역에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무주 공립 심상소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조선인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는 무주읍[1909년], 안성면[1919년], 무풍면[1923년], 적상면[1923년], 부남면[1924년], 설천면[1926년]에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중등 교육 기관은 없었다.
1934년 4월 1일부터 일제가 농촌 지역에서 실시한 ‘간이 학교제’에 따라 무주에도 간이 학교가 설립되었다. 부남면에 장간 간이 학교, 설천면 삼공리에 심곡 간이 학교[1934년], 무풍면에 덕지 간이 학교[1936년], 설천면 기곡리에 기곡 간이 학교, 부남면 가당리에 가당 간이 학교[1940년], 적상면 포내리에 괴목 간이 학교[1943년]가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무주 농사 학교(茂朱農士學校)가 개설되었다. 1927년 10월부터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 야학(勞動夜學)이 설립되어 150명의 학생이 공부하였다.
[무주 지역의 민족 운동]
무주 지역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간 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3·1 운동에 대한 소식이 늦게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보다 한 달 정도 늦게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4월 1일 오후 2시쯤 무주읍 시장에 모인 40~50명은 전일봉(全日奉), 한태선, 서판달 등이 여올 교회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가지고 나와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만세 시위는 무주 헌병 분견대에 의해 해산되었고, 전일봉과 보통학교생 3명이 구속되었다. 그날 밤, 시위대는 무주읍 주위의 산성에 올라가 횃불 시위를 하였고, 봉화와 함께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번져 산발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무주 지역민의 사회의식,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지면서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
무주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는 1920년 만주에서 독립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운 김판두(金判斗), 1924년 전주 고등 보통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주동한 김환태(金煥泰),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나진의 약초 공립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최낙철(崔落哲) 등이 있다.
1925년 8월 17일에는 무주 읍내에서 1,000여 명의 농민이 주(酒) 조합원 이외는 양주(釀酒)를 불허한다는 군 당국의 방침에 분개하여 주(酒) 조합을 상대로 금주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에는 야학 중지 명령을 받은 구천동 노동 야학 학생들이 당국에 항의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1928년에는 영동·무주 간 도로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위해 무주 군민을 동원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무주 군민들이 시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