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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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태규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
[선사 시대]
무주군은 비록 산간 지대이지만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삶을 영위하였음이 나타난다. 구석기 유적은 발견된 바 없지만, 남대천(南大川) 수해 복구 현장에서 신석기 시대 토기가 발견된 바 있고, 설천면 기곡리 일대에서 간 돌도끼[마제 석부], 간 돌살촉[마제 석촉]이 수습되었으며, 적상면 사천리 일대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삼한 시대에 현재의 무주군 무주읍에 해당하는 지역은 마한(馬韓)에 속하였으며, 나제통문(羅濟通門)의 동쪽인 무풍면 지역은 변진(弁辰)을 맹주로 하는 감문국(甘文國)에 속하였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을 평정하면서 이 지역을 정복하고 적천현(赤川縣)이라 칭하였고, 신라의 조분왕(助賁王)이 감문국을 토벌하고 무풍면 지역을 무산현(茂山縣)으로 개칭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삼국 시대에 적천현은 주변의 두이시현(豆尸伊縣), 물거현(勿居縣) 등과 더불어 백제의 진잉을군(進仍乙郡)[고려 시대 진례군(進禮郡)]의 영현이었다. 두시이현은 오늘날의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백제 멸망 후 순지(淳遲)로 고쳐서 노산주(魯山州)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757년(경덕왕 16) 이성(伊城)으로 고쳐 진례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한편 조선 현종(顯宗) 때 무주에 편입된 금산의 안성(安城), 횡천(橫川) 등 2개 지역은 대곡소(大谷所)와 함께 고려 시대 부리현(富利縣)에 속한 소로, 이전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660년(태종 무열왕 7)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까지 무산(茂山)과 주계(朱溪)는 백제와 신라 사이 국경을 접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으나 신라의 영토가 된 뒤 한촌(寒村)으로 전락하였다. 757년 주계를 단천현(丹川縣)으로 개칭해 전주 진례현(進禮縣)의 속현으로 삼았고, 무산을 무풍현(茂豊縣)으로 개칭해 상주 개령군(開寧郡)에 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단천과 무풍은 신라 하대까지 완전히 다른 역사 문화권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뒤 940년(태조 23) 주(州)·군(郡)·현(縣)을 정비하면서 단천을 주계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제로 개혁할 때 주계와 무풍은 강남도(江南道)에 소속되었다. 1018년(현종 9) 강남도가 해양도(海陽道)와 합하여 전라도가 될 때 주계와 무풍은 진례현의 속현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는 오늘날의 무주에 해당하는 주계, 무풍, 두이시현, 물거현[청거]이 모두 진례현의 속현으로 존재하였으며, 횡천과 안성은 진례현의 속소였다. 1176년(명종 6)에는 무풍에 감무가 설치되어 주계를 겸무하였으며, 1391년(공양왕 3) 주계가 무풍을 병합하였다. 고려 후기 도통사 최영(崔瑩)은 적상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해 적상산성(赤裳山城)을 쌓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난리에 대비하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전국에 왜구가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면서 전국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무주 지역에도 1284년(우왕 10) 7월 주계, 무풍 등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 시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덕유산(德裕山) 신령에게 나라의 창건을 고하고 호위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기 위하여 제자동(帝子洞)에 머물렀으며, 또한 동비현(銅碑峴)에 동비를 묻었다고 한다. 1398년(태조 7) 무주 향교(茂朱鄕校)가 창건되었다. 1414년(태종 14) 전국을 8도제로 개혁하면서 주계현과 무풍현을 통합하여 무주현(茂朱縣)으로 개칭하였는데, 오늘날의 ‘무주’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된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호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6월에 금산과 무주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9월 중순까지 무주 지역은 왜군에게 점령되어 약탈과 살상 등 온갖 수난을 겪었다. 왜군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장수와 남원 방면으로 잔출하고자 하였으나 장수 일대에서 전라도 관군과 의병의 활동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수차의 논의 끝에 적상산성이 수축되었고, 1614년(광해군 6)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를 설치하였다. 1633년(인조 11) 묘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게 되면서 1674년(현종 15)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금산의 관할이던 안성과 횡천을 편입하였다.
조선 후기인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박필현(朴弼顯), 정희량(鄭希亮) 등과 반란을 일으켜 북상하기 위해서 무주로 들어오려고 하자 당시 무주 부사 조유수(趙裕壽)가 이만번(李晩蕃)과 최봉래(崔鳳來)에게 막게 하여 무주로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근대]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때 동학 농민군이 무주 관아를 점령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민정을 실시하였다. 이에 무주 지역 유림들이 무풍과 안성에서 수성군을 결성하여 동학 농민군과 대항하였으나 농민군의 세력에 밀려 그 활동은 드러나지 못하였다. 2차 봉기 이후 무주에서도 동학 농민군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크게 확대되지는 못하였다. 동학군의 우금치 패배 이후 손병희(孫秉熙)가 피신길에 동학군을 이끌고 무주로 들어와 민보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후 일제는 명성 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여 단발령(斷髮令)을 단행하는 등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지방 관제가 정비되면서 무주 지역은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이듬해 전라도를 남북으로 나누면서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해 무주 지역 유림들이 모여 국왕에게 무너져 가는 국권을 회복해 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다. 1904년(고종 41) 지방관의 학정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무주 지부를 몰아내기도 하였다.
을사 늑약(乙巳勒約)과 군대 해산이 이어지자 무주 지역에서는 강무경(姜武景), 문태서(文泰瑞), 김동신(金東臣), 박춘실(朴春實), 신명선(申明善) 등이 이끄는 수많은 의병 부대들이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행정 구역이 개편되어 이전의 무주 지역 관내 12개 면과 금산군에서 편입된 부남면을 6개 면으로 하는 전라북도 무주군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이 무주 지역에 전하여지자 전일봉(全日奉) 등이 주도하여 무주읍 장날인 4월 1일부터 총 7회에 걸쳐 3,500여 명이 참여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현대]
6·25 전쟁을 전후로 무주 지역은 지리산에서 덕유산(德裕山)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조건에 의하여 남한에서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 중 하나였다. 덕유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의 준동과 이에 대한 군경(軍警)의 토벌 작전 과정에서 무주 지역 주민들은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1975년 2월 1일 덕유산 일대가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0년 개장한 무주 덕유산 리조트에서는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스키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14년 설천면에 국립 태권도원이 개관하며 덕유산 일대가 관광, 레저 및 동계 스포츠의 중심지로 되어 가고 있다.
무주군의 행정 구역은 1963년 6월 이후 몇 차례의 개편을 거쳤으며, 2017년 7월 현재 무주 군청 소재지인 무주읍을 비롯하여 무풍면, 설천면, 적상면, 안성면, 부남면의 1읍, 5면으로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