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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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朱溪古城- |
영어공식명칭 | Joogye Goseong teo |
이칭/별칭 | 적천성 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산52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원종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8년 - 주계고성 터 전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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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주계고성 터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산52 |
성격 | 성터 |
소유자 | 청주 한씨 종중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 있는 삼국~조선 시대 성터.
[변천]
주계고성(朱溪古城) 터는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 있는 '성안'이라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삼국 시대 백제의 동쪽 변방에 위치한 적천현(赤川縣)의 읍성(邑城)이었다. 무주 지역의 동쪽인 무풍에 있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성(城)]과 대치하여 국경 지대의 보루(堡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4년(태종 14)에 주계현(朱溪縣)과 무풍현(茂豊縣)이 무주현(茂朱縣)으로 통합되면서 무주현의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주계고성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의 문헌 기록에는 없으나, 무주 향교(茂朱鄕校)에서 간행한 『적성지(赤城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인위적인 훼손 없이 잘 보존되었다고 하나, 일제 강점기에 무주~금산 간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동쪽과 서쪽의 문이 헐리고 그 흔적을 잃고 말았다. 이후 주계 고성 터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종중의 소유가 되었다.
[위치]
무주 IC에서 무주군 무주읍으로 향하는 국도 제19호선을 따라가다가 싸리재 터널을 지나면 당산 교차로가 나온다. 당산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면 남대천(南大川)을 건너는 당산 대교가 나오고, 당산 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을 하면 남대천 변의 적천로로 이어진다. 적천로를 따라 200여 미터 가면 로터리가 나오는데, 우측의 대차로를 따라 300여 m 지점 우측에 '천운사'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성 내부로 이어지는 소로가 나오는데, 소로는 성 내부를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면서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와 연결된다. 주계고성 터는 이 소로의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을 포함하고 있는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주계고성 터에 대한 정식적인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88년에 전주 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무주 지방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나 형태 등은 알려지고 있지 않다.
[현황]
주계고성의 둘레는 약 1㎞이며, 포곡식(包谷式)의 석성(石城)이나 북쪽 성벽은 토석 혼축을 하였다. 무주군 무주읍의 진산인 향로산(香爐山)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의 말단부에 축성되어 있으며, 성의 남쪽에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남대천이 자연 해자를 형성하고 있다. 성의 남쪽과 북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토석을 혼용하여 축성하였고, 나머지는 석축성이다. 성벽 위에는 토루(土壘)가 둘러져 있다. 성 내부의 남서쪽에는 비교적 평탄한 곡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동헌 터'라 불리고 있다. 동헌 터의 주변에는 석축과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동문 터에는 좁은 소로가 개설되어 있다. 동문 터는 능선과 연결되는 곳으로 남쪽과 북쪽 봉우리가 위치한 가운데 지점에 해당한다. 서문 터는 남서쪽 평탄부로 성의 정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 터의 주변에는 석축성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성 내부에는 삼국 시대의 기와편을 비롯하여 선 문양이 타날된 토기편 등이 지표상에 산재하고 있다. 한편, 성의 서쪽에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으며, 산성 내부의 북쪽 구릉은 예비군 훈련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심각한 훼손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의의와 평가]
주계고성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오랫동안 무주 지역의 행정을 도맡았던 치소성(治所城)이다. 무주 지역은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대로 백제의 군사적 보루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삼국 시대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의 문화가 합해지는 지역적 특징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따라서 추후 학술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한다면 백제와 신라의 점이적 문화 성격을 파악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