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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890
한자 宗敎
영어공식명칭 Religion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경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77년 - 안국사 창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8년 - 무주 향교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0년 - 무풍면 증산 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3년 3월 5일 - 적상면 여올 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10월 10일 - 설천면 두길 교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9월 6일 - 천주교 무주 본당 설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9년 11월 - 원불교 무주 법당 개설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전라북도 무주 지역 종교의 발전을 역사 문화적으로 크게 나눠 본다면, 첫째는 고대 시대에 중국이나 인도 등으로부터 전래된 불교(佛敎)·유교(儒敎) 등의 종교의 흐름, 둘째는 조선 후기 천주교의 전래와 개신교의 확산, 셋째는 서학(西學)의 전래에 대응하여 한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학(東學)·원불교(圓佛敎)와 같은 신흥 종교(新興宗敎)의 흐름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그 외에 기타 종교로는 신자 수는 소수이나 근현대에 출현한 안식일 교회, 통일 교회, 금강대도(金剛大道), 국제 도덕 협회 일관도(國際道德協會一貫道), 한얼교, 신불사(新佛寺) 등이 활동하고 있다.

무주의 각 종교의 특성을 살펴보면, 우선 한국의 전통 불교가 호국 불교였음이 무주의 안국사(安國寺)·호국사(護國寺)를 통해서 잘 들어나며, 조선 시대의 유교가 지역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였음을 무주 향교(茂朱鄕校)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에 전일봉(全日奉)을 중심으로 무주 지역의 개신교도들과 지역민들이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런 사실을 통해 무주 지역의 종교적 특질을 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는 측면에서 무주 지역의 문화적 포용성과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불교]

무주는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을 평정하면서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 이른 시기부터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전하는 유적 또는 기록이 없다. 삼국 시대 말기 신라 시기의 사찰로는 구전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神文王)[681~692] 때 백련 선사(白蓮禪師)가 숨어 살던 곳에 백련암을 창건하였다는 내용과 신라 시대인 830년(흥덕왕 5) 무염 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고려 시대 사찰로는 안국사가 있는데, 『적성지(赤城誌)』의 적상산 안국사기에 의하면 고려 1277년(충렬왕 3)에 승려 월인(月印)이 창건한 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만년 대계를 위하여 승려 무학에게 명하여 복지(卜地)인 적상산(赤裳山)에 성을 쌓고 절을 짓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주 지역의 불교는 조선 중기 이후 덕유산(德裕山) 구천동을 중심으로 일대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서산 대사(西山大師) 청허(淸虛) 휴정(休靜)의 스승인 부용(芙蓉) 영관(靈觀)덕유산으로 출가하여 오랜 기간 동안 수행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에 각종 지리지나 기록들에서 나타나는 사찰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고경사(高境寺)[상산], 불두사(佛頭寺)[백운산], 산성사(山城寺), 호국사 등이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에는 북고사(北固寺)·구천사·원통사(圓通寺)·청량사(淸凉寺)·상원사·중원사·호국사 등이 보인다. 가장 최근의 기록인 『적성지(赤城誌)』[1898년]에는 안국사[적상산], 호국사·상원사·북고사·구천동사·원통사·백운암(白雲庵)·청량사 등의 사찰 이름이 확인된다.

근대기에는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승려 백용성(白龍城)이 1918년 무주읍에 향산 선원을 세우고 도심 포교를 하였다. 이처럼 불교는 삼국 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무주 지역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무주 지역에는 다수의 사찰이 있다. 전통 사찰로는 북고사·백련사(白蓮寺)·안국사·원통사·향산사(香山寺) 등이 있고, 일반 사찰로는 만복사(萬福寺)·인월암(印月庵)·관음사(觀音寺)·극락사·약천사·용천사·지장사·용황사·대원정사 등을 비롯하여 20여 곳이 있다. 그러나 무주 지역 사찰은 안국사, 백련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규모가 작고 각 사찰의 신도 수는 100명 내외로 영세하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불교 신자 수는 3,785명으로 무주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 37.2%를 차지한다.

[유교]

유교는 공자(孔子)가 창시한 사상 혹은 학문 체계를 뜻하며 유학(儒學), 유가(儒家), 유도(儒道)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교가 중국에서 들어온 이후 지방에 향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조선 시대인 1398년(태조 7) 무주 지역에 유교 교육의 거점인 무주 향교가 들어선 것으로 전한다. 무주 향교의 위치는 1530년(중종 25)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재현동삼리(在縣東三里)’와 신증(新增) ‘금이재북삼리(今移在北三里)’이다. 1898년(고종 35)에 발간된 『적성지』 제2권 학교 편에 “향교는 본래 관아(官衙)의 북쪽에 있었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호환(虎患)이 있어서 향로봉(香爐峯) 아래 서쪽 제방 위로 건립하였는데 그 터가 낮고 습기가 많아 순조 30년(1830)에 향로산 남쪽 기슭 아래로 옮겨 건립하였다”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역대 무주 부사들은 향교의 흥학을 위해 무주 향교를 여러 차례 중수하였고, 특히 최훈 부사는 산실(散失)된 서책을 마련하기 위해 종이를 구하고 아전을 완영(完營)에 보내 책을 인쇄해 오도록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사재라고도 불리는 시술재(時術齋)는 1849년(헌종15)에 창건되었다. 무주 향교는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무주 향교는 1398년 현사(縣舍)의 북쪽에 창건되었다고 전해 오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처음 건립된 향교에 호랑이가 나타나 해를 입히자, 1692년(숙종 18) 그 당시 무주 부사 김몽신이 향로산 서쪽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지대가 습해 60여 년 동안 10여 차례나 수선을 해야만 하였다. 조선 시대 무주 향교는 이 지역의 교육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에는 신학제 실시로 교육의 기능이 사라졌다.

무주 지역의 사학 기관으로는 서원을 들 수 있으며, 죽계 서원(竹溪書院)[1713년]·주계 서원(朱溪書院)[1725년]·도산 서원(道山書院)[1813년]·백산 서원(柏山書院)[1821년]·분양 서원(汾陽書院)[1942년] 등이 있다. 무주 지역의 사묘(四廟) 또는 사우(祠宇)로는 죽림사(竹林祠)·세덕사(世德祠)·설호사(雪湖祠)·유천사(裕川祠)·가일사(加一祠)·도남사(道南祠)·백촌사(白村祠)·서씨세사(徐氏世祠) 등이 있다. 재각으로는 각천재·경모재(景慕齋)·고반재(考槃齋)·두람재(斗籃齋)·육영재(育英齋)·화산재 등이 있고 정각으로는 강수정(講樹亭)·둔세정·만벽정(晩碧亭)·분의정(分宜亭)·비암정(秘巖亭)·사유정(四柳亭)·서벽정(棲碧亭)·집승정(集勝亭)·초려정(草廬亭)·풍호정(風乎亭)·환수정(喚睡亭) 등이 있다. 특히 서벽정은 한말(韓末)의 거유(巨儒) 송병선(宋秉璿)이 머물며 유학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향교와 서원 등 유학 관련 시설들이 산재해 있어 유학의 영향이 대한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무주 지역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현재 무주의 유교는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원불교]

원불교 제1 경전인 『정전(正典)』 총서 편에 의하면 원불교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에 의하여 파란고해(波瀾苦海)의 일체 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창시되었다. 원불교는 한국에서 창시되었으며, 최제우(崔濟愚)의 동학, 강일순(姜一淳)의 증산도(甑山道)에 이어 후천 개벽 사상(後天開闢思想)을 포함하는 민중 종교로 출발하였다.

원불교가 무주 지역에 포교의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이었다. 초기에는 이웃하고 있는 진안 교당(鎭安敎堂)의 교무가 무주의 민가(民家)에서 출장 법회를 가졌고, 1968년 4월 선교소 승인이 나왔다. 그렇지만 진안의 김보선 교무가 계속 출장 법회를 갖으면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69년 11월 법당(法堂)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고, 1970년 3월 초대 교무에 김덕현 교무가 부임하여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1973년 김대신 교무가 뒤를 이어 부임하면서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931-1번지[주계로4길 9]에 대지 376.85㎡, 건평 128.92㎡의 집 한 채를 매입하여 이안 봉불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제6대 김선영 교무 재임 당시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294-3번지[향학로 68]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89년 원불교 무주 교당은 남원 관할로 신자 수는 100여 명이었으나, 2003년에는 300여 명이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원불교 신자 수는 164명이다.

[천주교]

천주교는 조선 시대 조선인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 수용된 이후 천주교 신자가 나오고,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가 1784년(정조 8)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수용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기해박해(己亥迫害)·병인박해(丙寅迫害)·병오박해(丙午迫害) 등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었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무주 지역에 처음 천주교 신자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6년(고종 3)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여우내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였고, 이 외에도 여러 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1866년 발생한 병인박해로 인해 무주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가 그 뒤 1883년(고종 20)경에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여우내 공소[신자 수 45명. 1885년에는 55명]에서 송군실·장지화·박화서·이경재·장화성·김학자 등의 신자와 무풍면 등지에 40여 명의 신자들이 다시 모여 화전(火田)을 일구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1900년(고종 37)경에는 대부분이 생업을 찾아 타지로 떠나게 되어 무주에는 천주교 신자가 거의 없어졌다. 그러던 1909년(순종 3) 숙구지 공소가 설립되었으나 이 역시 신자들의 이주로 폐쇄되어 1940년까지는 천주교 신자의 자취를 볼 수 없었다. 1941년 무주군 무풍면 은산리 공소, 1954년 현내리 북리에 현대 공소 등이 설립되었고 1956년 9월 전주 교구 금산 성당에 속해 있던 은산·철목·현내·율속 등 4개 공소를 중심으로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현재 무주 지역의 천주교 관련 시설로는 무주 천주교회, 무풍 공소, 설천 공소, 괴목 공소, 안성 공소 등이 있다. 은산 공소와 철목 공소는 2000년대 들어 무풍 공소에 통합되어 운영되고 있고, 기곡 공소는 본당 직할로 조정되었다. 따라서 현재 무주 천주교회 소속 공소는 무풍·괴목·설천·안성 공소 4곳이다. 무주 지역의 천주교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해 왔고, 현재 신자 수는 1,000여 명 정도이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 수는 1,031명으로 무주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 10.1%를 차지한다.

[개신교]

호남과 충청도 일부 지방은 1983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 지역으로 선정되어 전주 교회가 탄생되었다. 자연히 호남 지방은 장로교가 교세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고, 전라북도의 동부에 위치한 무주 지역도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서 개신교가 전래되었다. 『증산 교회 100년사』, 『여올 교회 100년사』 등에 의하면 무주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시작한 교회를 무풍면증산 교회[1900년 봄]로 보고 있고, 이어서 적상면여올 교회[1903년 3월 5일], 설천면의 두길 교회[1904년 10월 10일] 등이 설립된 것으로 본다.

현재 무주 지역에서 활동 중인 교회로는 증산 교회·여올 교회·내도 중앙 교회 등을 비롯하여 50여 곳에 달한다. 읍면 지역별로 살펴보면 무주읍에는 가옥 교회·내도 중앙 교회·대차 교회·무주 장로교회·앞섬 교회·오산 교회·융포 교회·전북 무주 교회·충천 교회 등이 있다. 무풍면 지역에는 금평 교회·무풍 교회·증산 교회 등이 있으며, 설천면 지역에는 구천동 교회·구천 장로교회·기곡 교회·대미 교회·두길 교회·설천 교회·장덕 교회·청량 교회 등이 있다. 적상면 지역에는 마산 교회·삼가 실로암 교회·삼유 교회·상곡 교회·새재 교회·시온 교회·여올 교회·적상 교회·하가 교회 등이 있다. 안성면 지역에는 금사 교회·성덕 교회·공진 교회·안성 교회·명천 교회·제일 교회·전도 교회·하이목 교회·예원 교회·죽장 교회 등이 있다. 부남면 지역에는 가당 교회·굴암 교회·대유 교회·대유 제일 교회·부남 대소 교회·부남 제일 교회·선천 교회 등이 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 수는 4,969명으로 무주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 48.9%를 차지한다.

[기타 종교]

기타 종교에는 신흥 종교와 유사 종교(類似宗敎) 등이 포함된다. 신흥 종교란 기성 종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구한말 새로 일어난 자생 종교를 말하는데, 1860년에 창도된 동학[현재의 천도교]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종교를 말한다. 신흥 종교는 동학이나 단군교(檀君敎)와 같은 민족적 종교도 있으나 기독교와 같은 서구 종교 계통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교리(敎理)를 주장하여 만든 교단(敎團)도 있고, 불교나 유교 등의 전래 종교에 한국인이 새로운 이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교리를 가진 경우도 있다. 유사 종교는 공인되지 아니한 종교를 말하는데, 기존의 전통 종교들에 대한 강한 반작용으로 생겨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시대 상황에 적응해 가며 새롭게 생겨나거나 변형되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들은 어떤 면에서 종교의 형태를 띠고는 있으나 전통 종교와는 색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유사 종교[Quasi-religion] 혹은 종교에 대한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alternatives of religio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라북도는 모악산(母岳山) 주변에 수많은 군소 종교 단체가 난립하였으나 근래 들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무주는 덕유산이 있어 크고 작은 신흥 종교가 있을 법하나 의외로 없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에는 오늘날 증산교에 해당되는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서인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1989년 당시 무주군에서 활동하던 신흥 종교로는 금강대도, 기선법단, 단군교, 안성 승리 재단, 여호와 증인, 천리교, 통일교, 한얼교 등이 있었다.

2003년 현재 무주 군청에 등록되어 있거나 파악된 기타 종교는 60명의 신자가 있는 국제 도덕 협회 일관도[대표 김금일]와 100여 명의 신자가 있는 금강대도 무주 분원[대표 유문호]이 있다. 그리고 2001년에 파악된 종교로는 안식일 교회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에 무주군에 있던 기선 법단과 승리 재단[안성면] 등이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이들 종교에서 무주 군청에 등록하지 않았거나 무주 군청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통일교의 경우, 2004년 기준, 국제결혼을 통해 무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이 있으며, 최근[2001년]에는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 통일 교회, 적상면 사천리에 적상 통일 교회로 있었다. 그리고 단군교와 관련해서는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 내북동에 1984년 3월 1일 시작된 신불사(神佛寺)가 있으며, 소천리 내양지에는 1972년 2월 5일부터 시작된 한얼교 설천 지교에 약 10명의 신도가 있다. 그리고 무주 읍내에는 대한 천리교 무주 교회와 여호와의 증인 교회가 있다.

현재 무주 지역 기타 종교 현황으로는 안식일 교회, 통일 교회, 금강대도, 국제 도덕 협회 일관도, 한얼교, 신불사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상으로 보아 무주군에서 기타 종교에 해당되는 신도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영향력이나 세력 역시 미비한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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