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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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城邑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진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 있는 집성촌.
[개설]
의성읍은 의성군청 소재지로서 여러 행정 기관이 위치한 행정의 중심지이며, 도·농 복합 형태의 소규모 도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시가지 동남부에 오토산이 솟아 있어 사곡면·금성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에는 구봉산, 북쪽은 점곡면·단촌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읍의 중앙에는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남대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의성읍은 13개 법정리, 31개 행정리, 190개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 2리, 중리 1리, 팔성 2리, 용연 1리, 업 1리 등이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형성과 변천]
의성읍에는 의성 김씨, 아주 신씨, 달성 배씨가 많은 분포를 보이는데, 입향하여 집성 마을을 이루며 살다가 다시 주변의 마을로 분가하여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형태를 보인다.
원당 1리, 원당 2리와 중리 1리는 의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원당 1리는 약 600년 전에 의성 김씨들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 지금까지 의성 김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원당 2리의 의성 김씨 입향조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단지 의성 김씨 형제라고만 전한다. 중리 1리의 의성 김씨 입향조는 김용비(金龍庇)이다.
팔성 2리와 용연 1리는 아주 신씨 내부령공파, 즉 읍파들의 집성촌이다. 의성군 거주 아주 신씨는 내부령공파[읍파]와 봉주공파[구파]로 나누어지는데, 의성읍에는 주로 내부령공파가 세거해 왔다. 읍파는 아주 신씨 4세인 의성 입향조 신윤유의 장손 신광부를 중시조로 신사렴과 신석명으로 대가 이어진다. 읍파의 성립은 신석명이 의성읍으로 이주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전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만경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팔성리의 아주 신씨 입향조는 아주 신씨 읍파 신석명의 고손자인 신적도의 아들 신채이다. 그는 1646년(인조 24)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며, 성균관에 수학할 때 문행이 뛰어나 영남의 삼모(三某)란 칭송을 들었으나,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재 문집(忍齋文集)』이 있으며, 후에 단구 서원(丹邱書院)에 배향되었다. 용연 1리의 아주 신씨는 팔성리의 신씨가 분가한 것으로 보인다.
업 1리는 달성 배씨의 세거 집성촌이다. 달성 배씨가 이 마을에 입향한 것은 임진왜란 직후라고 전한다. 마을 뒷산에 용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업(業)을 얻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업골[業谷] 또는 용암동(龍岩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황]
의성 김씨 집성촌인 원당 2리는 『의성 군지』에 따르면 1998년 현재 총 80가구 중 의성 김씨가 60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중리 1리는 1998년 현재 265가구 중 의성 김씨가 85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고려 말 김용비가 홍건적을 소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碑閣)이 있다.
아주 신씨 집성촌인 팔성 2리는 1998년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아주 신씨가 20여 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팔성 2리에는 효자 신원록의 불망위 사당(不忘位祠堂)과 효자 신정모의 유허 비각이 있다. 용연 1리는 1998년 현재 총 70가구 중 50가구가 아주 신씨이다. 이밖에도 경상북도 의성읍 도동리에는 아주 신씨들의 오랜 세거지임을 말해 주듯 1615년에 건립한 신원록의 정려비와 유허비가 있다. 이후 도동리는 1800~1950년 사이 해주 오씨 집단 세거지이기도 했다.
달성 배씨 집성촌인 업 1리는 1998년 현재 총 80가구 중 달성 배씨가 40여 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달성 배씨와는 관계없지만 의성읍 도동리 지역에서 오래 세거해 온 해주 오씨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고려 때 충신인 오국화를 기리기 위해 유림에서 세운 우곡 서원과 우곡단, 우곡 서당, 신도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