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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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구성집(具聖執)[1876~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덕천리 출신으로, 1906년 9월 12일경 김동산(金東山) 의진의 일원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상북도 봉화군·강원도 삼척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일을 맡았고, 9월 25일경에는 삼척군 개산동의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군자금을 모았다. 1907년 7월경에는 성익현(成益賢)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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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안동. 자는 순백(舜伯). 호는 만포(晩圃).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에 세거한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32세손이다. 권대직(權大稷)[1853~1930]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출신으로, 1895년 전기 의병 전쟁이 발발하자 김상종 의진에 가담하였다. 의성 의병은 경상북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게 창의하였다. 먼저 봉기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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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김반석(金盤石)[187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사미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거의한 박연백(朴淵伯) 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박연백은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공산(孔山)에서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다. 김반석은 의성·영흥·영천·청송 등지로 옮겨 다니며 야간 기습과 화공을 펼쳐 일본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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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장. 호(號)는 운산.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수익(金壽翼)이고, 어머니는 한산인 이덕(李悳)의 딸이다. 부인은 도사 이만기(李晩起)의 딸인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김회종은 동생이다. 김상종[1847~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신으로, 안동 의병 주역인 정재학파 문인인 김흥락과 김도화의 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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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안동. 생원 김양징(金養澂)의 손자로 아버지는 인암(忍庵) 김헌유(金憲裕)이고, 어머니는 이병은(李秉殷)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김수담(金壽聃)[1852~1896]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사촌 출신으로, 의성에서 을미의병 당시 봉기한 김상종 의진에 참여하여 선봉장을 맡았다. 김수담은 김상종의 족숙이었다. 김상종 의진은 거병한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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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안동(安東).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고손자(高孫子)로서 아버지는 김율원(金栗園)의 문인 김영유(金永裕)이고, 어머니는 김한운(金漢運)의 딸 의성 김씨(義城 金氏)이다. 김수욱(金壽旭)[1852~190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사촌 출신으로, 성품이 온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김흥락의 문하에 수학하여 문학과 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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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안동. 만취당 김사원의 손자인 김상원의 9세손이다. 김수협(金壽莢)[1853~1896]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사촌 출신으로, 의성에서 을미의병 때 봉기한 김상종 의진에 참여하였다. 김상종의 동생 김회종이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에는 김수협이 관향장(管餉將)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수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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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 본명은 김길주(金吉周)이다. 아버지 김운휘(金運輝)와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하락(金河洛)[1856~1896]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교촌리 출신으로, 어릴 때 황학산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수학했는지 그 학통이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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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13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생원 김수익(金壽翼), 할머니는 한산 이씨 이덕(李悳)이다. 아버지는 김회종이며, 큰아버지 김세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의병장 김상종이 큰아버지이다. 김호직(金浩直)[1874~1954]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출신으로, 1895년 을미의병 봉기 때 의성에서는 유림 김상종이 의병을 일으겼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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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12세손으로 아버지 생원 김수익(金壽翼)과 어머니인 한산 이씨 이덕(李悳)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형은 의병장 김상종이다. 김회종(金會鍾)[1852~1916]은 정재 유치명의 문인인 김흥락과 김도화의 문인이었다. 을미의병 때 김회종은 아들 호직과 더불어 형인 김상종의 의병진에 참여하여 백의종군하였다. 당시애 김회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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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 박연백(朴淵伯)[1869~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박연백(朴淵白)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의 의병 항쟁사 중·후기에 속하는 시기에 의성 의진을 이끈 인물이다. 박연백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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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형원(馨遠). 호는 죽포(竹浦). 동강(棟岡) 이희정(李希程)의 후예이다. 이필곤(李苾坤)[1864~1907]은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오상동 출신이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 김상종이 의성에서 창의하자 이필곤은 주변 청장년들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함께 김상종 의진에 참여하였다. 김상종 의진의 중군을 역임하기도 하였던 이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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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조성학(趙性學)[?~?]은 김하락의 이종제로서, 김하락의 권유로 김하락 의진에 가담하여 도총을 맡았다. 조성학은 특히 『주역』에 근거한 군사적 소양을 바탕으로 전투 수행시 김하락을 도와 의진의 주요 방침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하락은 단발령 직후 거의하여 1896년 7월 순국할 때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김하락은 의병 전개 과정을 기록한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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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희석(姜凞碩)[1881~193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중, 38세의 나이로 안평면 석탑리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의성군 안평면 석탑동 교회 교인이었던 강희석은 송내동 교회 권수백(權秀伯) 조사(助事)의 권유로 같은 교회 교인 김복식(金福植)·정금동(丁今同) 등과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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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사연(權士淵)[1881~1925]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출신으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당시 석탑 교회 교인으로서 대사동 시위에 참여하였다. 대사동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 시위는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진행되었다. 권사연은 3월 17일 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김옥돈(金玉頓)·이만준(李萬俊) 등 15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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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상두(權相斗)[1870~1936]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출신으로, 안동 권씨 부정공파 와룡 감애[안동]가의 제일 큰집 출신이다. 3·1 운동 때 유림측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을 할 때,134명 유림 대표와 함께 서명하였다. 권상두가 살고 있던 단밀면은 원래 상주에 속해 있다가 1895년 비안군으로 편입되었다. 단밀면은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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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승헌(權承獻)[1898~198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출신으로, 점곡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의성 지방 3·1 운동에서 양반 유생이 주도한 시위는 봉양면 사부동과 점곡면 사촌동, 춘산면 금오동 등 세 곳이다. 특히 점곡면 사촌동 시위는 유림 집안인 안동 김씨 청년들이 나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점곡면소재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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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용하(權龍河)[1847~1910]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출신으로, 1893년 선략 장군 겸 사헌부 감찰(宣略將軍 兼 司憲府 監察)을 지냈다가 이후 농아가 되었다. 안동시 와룡면[의성군 안사면 월소리에 거주했다는 주장도 있음]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0년 음력 9월 7일 경상북도 의성에서 사촌형 권용혁으로 부터 대한 제국이 일제에 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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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중수(權重秀)[1869~1980]는 경상북도 의성군 산운면 학미리 출신으로, 권중권(權重權), 권성우(權聖佑)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5년에 결성된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는 독립운동은 지하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 광복회는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대한 광복단이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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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두국(斗國). 권해운(權海雲)[1894~1919]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의성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9일 권해운은 도리원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 군중을 모아 의성 경찰서로 돌진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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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경성(金慶聲)[1879~194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도덕리 출신으로, 김중탁(金重槖)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경성은 1919년 10월경 개인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였으며,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신흥 무관 학교에 입학하기를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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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군석(金郡石)[1890~1967]은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구련리 출신으로, 조문면에서의 3·1 운동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조문면의 시위는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낙현(朴洛鉉)과 같은 교회 집사 윤용구와 교인 윤영주·오상룡 등이 3월 18일 의성 장날 장터에서 시위할 것을 결의하여 시작되었다. 4명은 동지 규합에 나서 같은 교회의 김자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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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규복(金圭福)[1905~1977]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중리 출신으로, 김규만(金圭晩)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김규복은 1925년~1926년 경 대대적으로 정비된 의성 청년회의 집행 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 공산당 운동의 일환으로 1932년 10월 10일에 조직된 의성 적색 독서회에도 참여하여 농민부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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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길도(金吉道)[1878~1924]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안평면 시위는 3월 15일부터 19일까지는 안평면 대사동 교회를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15일, 16일 시위대는 밤 8시경 마을 앞에 있는 밭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곧 시위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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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도식(金道式)[1889~192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고 그 다음날인 3월 19일에는 4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도리원 장터로 시위 행진한 다음 도리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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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돈(金墩)[1887~?]은 김돈(金敦), 김돈(金燉)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천리 출신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와 국민부에서 활동하였다. 신민부는 1925년 영안현·액목현 등지를 기반으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김돈은 중앙 집행 위원·심판부 위원장(審判部委員長)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신민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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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만식(金萬植)[1921~?]은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출신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미국 정보 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훈련을 받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군은 1945년 5월 OSS와 제휴하여, 한반도 진입을 위한 ‘독수리 작전’에 착수했다. OSS와의 합작 훈련은 2지대와 3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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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명출(金明出)[1893~1987]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계리 출신으로, 비안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비안면 독립 만세 시위는 쌍계 교회 중심으로 일어났다. 쌍계 교회 박영화 목사 등 추진 세력은 밀의를 거듭하면서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김명출을 비롯한 배도근·이일만·박세길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태극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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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봉수(金奉洙)[1900~197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 출신으로, 안평면에서 3월 15일부터 19일 사이에 벌어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봉수는 17일 안평면 하령동에서 동리 청년들과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연창하면서 안평면 삼춘동까지 행진하였다. 19일에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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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부문(金富文)[1887~195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된 점곡면 만세 시위는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여기에 윤암동의 영양 남씨, 송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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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김성수(金成守)[1890~1965]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비안면 동부동·서부동 주민들에 의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의성군에서 벌어진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는 3월 12일 비안면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쌍계동의 만세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부동에 사는 김석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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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오명(金五命)[1889~1933]은 김명식(金明植)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 출신으로, 의성군 안평면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3월 15일 대사동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가 주민들의 참여가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9일까지 안평면 일대에서 계속되었다. 3월 19일에는 도리원 장날 장터에서 약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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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옥돈(金玉頓)[1889~1975]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월 15일에서 19일까지 가장 대규모로 전개된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1~12일 경 그는 이화실의 집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3월 15일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후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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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원휘(金原輝)[1884~1949]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비안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김원휘는 안평면 괴산동 괴산 교회 조사(助事)로서, 평양 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마침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만세 시위를 목격하였다. 그는 시위로 인해 학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4일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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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위창(金渭昌)[1900~1941]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처음 송내동 교회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교회의 권수백 조사는 사촌동의 김태호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같은 동네 김위창을 비롯 김점득·김유경·김수석·김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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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유식(金有式)[1899~195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안평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대사동 교회 교인 중심으로 전개된 이 시위는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진행되었다. 3월 19일 김유식을 비롯 권사연·김일석·이봉수·김치명 등이 앞장서서 시위 군중과 함께 장터에 있는 도리원 주재소로 몰려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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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익휘(金益輝)[1885~1959]는 김익하(金益夏)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최대 규모로 전개되었던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사동 교회 집사인 이화실로부터 “만세 운동을 하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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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일석(金日錫)[1891~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마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도리원 장날의 시위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3월 19일 김일석을 비롯 권사연·김유식·이봉수·김치명 등은 도리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시위 군중들에 앞장 서 시위를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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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자룡(金子龍)[1893~1954]은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구련리 출신으로, 의성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 조문면 대리동 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주도하였다.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낙현(朴洛鉉)은 1919년 3월에 대구 성경 학당에 갔다가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급히 귀향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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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재범(金在範)[1900~1931]은 김재범(金載範)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출신으로, 1919년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3학년에 재학 중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계성 학교의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권의윤·최경학(崔敬學) 등은 학생 대표들인 김재범(金在範)을 비롯,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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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차쇠(金且釗)[1899~1920]는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덕곡리 출신으로, 의성군 신평면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의성 지역에서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3월 19일을 고비로 점차 수그러들었다가 3월 25일 신평면 덕봉 교회 교인이 마지막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덕봉 교회 교인 김수성과 이학술 두 명이 만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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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천특(金千特)[1888~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출신으로, 의성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의성면의 시위는 조문면 대리동 교회 교인들 중심으로 영수인 박낙현(朴洛鉉)이 1919년 3월에 대구 성경 학당에 갔다가 거기서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장터에서 만세 부를 것을 결의하였다.이들은 동지 규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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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충한(金忠漢)[1883~196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출신으로, 김천 황금동 교회 조사였다. 3월 9일 김천에 있는 황금동 교회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알고 지내던 김원휘,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김천으로 온 계성 학교 학생 김수길, 황금동 교회의 원로인 최용수, 교회 조수 한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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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치근(金致根)[1878~193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7일과 19일 안평면과 봉양면 도리원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7일에는 시위 군중이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마을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창길동(倉吉洞)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행진하며 만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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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호문(金好文)[1887~194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송내동 교회 교인이자 김해 김씨 일족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부친 김수배와 함께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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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희문(金喜文)[1889~1970]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켰으며, 윤암동의 영양 남씨,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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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규우(南圭佑)[1889~1967]는 남오대(南梧大)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점곡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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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양.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예이다. 남승순(南勝淳)[1857~192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 사촌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장남 남규우(南圭佑)·황금종(黃金鍾)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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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노재섭(盧在燮)[1924~1977]은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출신으로, 중국 호남성(湖南省) 제9전구(戰區) 신편 제15사(新編第15師)에 편입되어 항일 유격전에 참가하였다. 중국 제9전구는 호남성을 중심으로 호북성(湖北省)의 양자강 이남과 서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전구(戰區)였다. 노재섭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파견 일본군에 배속된 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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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낙현(朴洛鉉)[1887~1957]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의성읍 장날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낙현은 조문면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대구 성경 학당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갔다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과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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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노수(朴魯洙)[1907~?]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1920년대 서울에서 공학회(共學會)·서울 학생 구락부·경성 청년회, 그리고 일본에서 신간회 동경 지회 등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8월 30일 의성군의 옥산면·점곡면·단촌면 청년 박명옥(朴明玉)·유시언(柳時彦)·김성윤(金成允) 등과 함께 의성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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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두완(朴斗完)[1888~1966]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전개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박두완은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 등이 주도하는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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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만녕(朴萬寧)[1898~1967]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비안면에 있는 비안 공립 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으로 상급 학생으로 급장(級長)이던 우희원(禹熙元)·박기근(朴基根)[혹 朴望牙]·정인성(鄭寅成) 등과 함께 3월 9일부터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독립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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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1919년 3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 교회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한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장남이다. 박상동(朴尙東)[1894~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재학 중 대구 서문 시장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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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석홍(朴錫洪)[1896~1985]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서 출신으로,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 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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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세길(朴世吉)[1876~1946]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에 참가하였다. 3월 12일 박영화는 동료들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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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수석(朴秀碩)[1884~1944]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 출신으로, 금오리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사람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신병섭, 신종환과 함께 만세 시위 실행을 결의하고 거사일을 4월 3일로 계획하였다. 박수석은 4월 2일 신종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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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수영(朴秀永)[1893~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3월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기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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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시목(朴時穆)[1894~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2월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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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달(朴永達)[1887~1962]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과 함께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영달은 박영화·박영신·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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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신(朴永新)[1891~1942]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동 쌍계 교회의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동생으로 쌍계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위한 구체적 계획에 참여하였다. 박영신은 3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형 박영화를 비롯하여 박영달·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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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화(朴永和)[1859~1923]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평양 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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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인욱(朴寅郁)[1896~1934]은 박주욱(朴宙郁)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인욱은 3월 12일 박영화·박영달·박영신·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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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장호(朴章鎬)[1886~1961]는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 등이 대구 서문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 시장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 고등 보통학교·신명 여학교·대구 성경 학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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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재화(朴在華)[1890~1928]는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출신으로, 1922년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 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김혁(金爀)·김호(金虎) 등의 주도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흥업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산업 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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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천수(朴千壽)[1897~1947]는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에 참가하였다. 3월 18일 밤 9시 사촌동 동민 600~700명이 횃불을 밝히며 만세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에도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박천수는 김성갑(金聲甲)·김용준(金龍俊)·신주칠(申周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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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달근(裵達根)[1865~1944]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배달근은 박영화·김원휘·박영신(朴永新)·박영달(朴永達)·배중엽(裵重曄) 등과 함께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월 12일 박영화·박영신·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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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도근(裵道根)[1866~1923]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정오 무렵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동민들은 함께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박영신·박영달·배달근·배중엽 등이 만든 200장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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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선두(裵善斗)[1924~생존]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남경(南京) 지구에 배속되어 있던 중,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에 관한 정보를 듣고, 1944년 3월 권오옥(權五玉)[안동 일직]·구칠성(具七星)[또는 具七龍]·이용득(李龍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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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세태(裵世泰)[1890~194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동리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배세태는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다음 날에도 오후 8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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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용도(裵容度)[1895~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영화(朴永和)·김원휘·박영신(朴永新) 등은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배용도를 비롯한 배도근·배용석·이일만·김명출·박세길 등이 합세하였다. 배용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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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용석(裵容奭)[1890~1938]은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비안면 쌍계동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박영화는 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위하여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마을로 돌아오자 교인들과 동민들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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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중엽(裵重曄)[1882~1934]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과 함께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배중엽은 박영화(朴永和)·김원휘·박영신(朴永新)·박영달(朴永達) 등과 함께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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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두수(申杜洙)[1927~1986]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출신으로, 경주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4월 안동 농림 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일제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이정선(李貞善)·권태염(權泰琰)·정현모(鄭賢模)와 함께 정세를 틈타 무장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는 비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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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병섭(申炳燮)[1892~1933]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주민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던 중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는 것은 후일 독립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7일 이웃 고을 청송군 화목 시장(和睦市場)에서도 운동을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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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산축(申山祝)[1907~1939]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개일리 출신으로, 1932년 5월 17일 일본 아이치현[愛知縣]에서 문화 보급회(文化普及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 보호 활동 및 민족 의식 고양을 위한 계몽 활동 등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8년 12월 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9년 2월 12일 나고야[名古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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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종환(申宗煥)[1890~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 출신으로, 금오리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사람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신병섭, 박수석과 함께 만세 시위 실행을 결의하고 거사일을 4월 3일로 계획하였다. 신종환은 4월 2일 박수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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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주칠(申周七)[1890~1938]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은 3월 18일 오후 9시 사촌동 오후 11시경 서변동 만세 시위로 이어졌고, 3월 19일에는 다시 사촌동의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신주칠은 이때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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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진수(申震洙)[1885~1946]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2일과 13일 대리동 교회 목사 박낙현과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 등이 3월 18일 의성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박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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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기수(吳麒洙)[1892~1959]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 출신으로, 1912년 경성 관립 공업 전습소(京城官立工業傳習所)를 졸업하고 임시 토지 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기수(旗手)로 근무하다가 의성 경찰서 순사보(巡査補)로 근무하였다. 1919년 5월 만주로 가서 조선 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고 귀향하여 1919년 음력 9월 경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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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병수(吳丙洙)[1905~1938)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출신으로, 1932년 10월 10일 의성군 의성면 도서동에서 오기수(吳麒洙)·김규복(金圭福)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지도 기관으로 의성 적색 독서회(義城赤色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오병수는 청년부 책임자를 맡았고 의성 체육회(義城體育會)를 장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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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서희(吳庶熙)[1922~1996]는 오동수(吳桐秀)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출신으로, 중국 봉천 소학교(奉天小學校)를 졸업하고 재봉 회사에 근무하다가 한국 광복군 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일명 韓光班]을 졸업하고 광복군(光復軍) 제2지대 2구대에서 한·미 간의 군사 합작(軍事合作) OSS 훈련을 받았다. 오서희는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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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진문(吳進文)[1896~195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출신으로, 1919년 8월부터 대구에서 오기수(吳麒洙) 등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폭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1920년 1월 의성 출신 오기수와 김영우 등과 함께 조선규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740원을 제공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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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재현(在見). 호는 육봉(六峰). 우용택(禹龍澤)[1868~1940]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출신으로, 한말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친일 매국노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매국 행위를 질타한 강개지사(慷慨之士)로 당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고종은 그의 의로운 행실을 듣고 참봉(參奉)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우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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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승필(兪承弼)[1891~1974]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마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이북술[일명 李華實]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전개된 만세 시위 행진에 참여하였으며, 19일에는 도리원 장날을 기해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유승필은 도리원 시위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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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영주(尹營柱)[1893~1988]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대구 기독교 성경 학교(基督敎聖經學校)에 재학 중 1919년 3월 8일 대구 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의성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윤영주는 3월 12일 대리동 교회의 신도인 윤용구와 오상룡(吳相龍) 등과 함께 의성읍의 장날인 3월 18일 만세 시위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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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용구(尹龍九)[1891~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의성읍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3일 대리동 교회 목사 박낙현과,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과 함께 의성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고 박낙현·윤영주·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대한국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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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만준(李萬俊)[1888~1971]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오후 8시경 이양준(李良俊)·권사연(權士淵)·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 등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안평면 괴산동을 출발하여 창길동(倉吉洞)·화령동(花寧洞) 일대로 시위 행진을 전개하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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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맹준(李孟俊)[1897~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대사동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이맹준은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그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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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배기(李培基)[1892~1974]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안평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李鍾出)과 교인들이 주도하는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 행진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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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수(李鳳壽)[1878~1919]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이봉수는 이북술(李北述)의 권유를 받고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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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 이북술(李北述)[1887~1970]은 이화실(李華實)·이호출(李浩出)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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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원(李守元)[1874~1964]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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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순근(李順根)[1893~195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이양준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안평 주재소를 향하여 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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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양준(李良俊)[1890~1921]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대사동 교회의 이종출은 3월 12일 비안면 쌍계 교회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양준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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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득(李龍得)[1924~1992]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출신으로,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파견 일본군 6844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중,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에 관한 정보를 듣고, 1944년 3월 권오옥(權五玉)·구칠성(具七星)·배선두(裵善斗)·조일주(曺日周) 등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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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춘(李元春)[1871~1936]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5일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동리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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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현(李元鉉)[1926~1945]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상업 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 항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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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이경(李利景)[1890~1968]은 이동호(李東湖)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 이북술·김옥돈·이만준(李萬俊)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시위를 벌였으며,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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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일만(李一萬)[1903~1954]은 이종연(李鍾淵)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 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정오 무렵 마을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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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인(李在寅)[1907~1964]은 의성군 의성읍 출신으로, 1935년 1월경 의성읍 교회 청년을 중심으로 결성된 청년 면려회(靑年勉勵會)를 항일 운동 단체로 조직 개편하였다. 이재인은 의성읍 교회의 목사인 유재기(劉載奇)가 “조선 민족은 현재의 비경(悲境)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의 손에서 되돌려 찾아내는 일 외에는 없으며 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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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구(李鍾九)[1924~2004]는 의성군 단밀면 출신으로,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파견 일본군에 배속되어 있던 중,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에 관한 정보를 듣고, 1944년 3월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제9전구 유격대에서 활동하였다. 중국군 제9전구는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하여 호북성(湖北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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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순(李鍾珣)[1882~1934]은 의성군 봉양면 사부리 출신 유생(儒生)으로, 1919년 3월 17일부터 18일에 걸쳐 봉양면 사부동에서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종순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래 평소 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중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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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출(李鍾出)[1890~1966]은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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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태원(李兌遠)[1928~현재]은 1927년 의성군 단촌면에서 출신으로, 2012년 6월 현재 생존하고 있다. 대구 상업 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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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능(大能). 호는 경산(耕山). 고려 시대 영동정(領同正) 이전(李磚)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이장수(李章秀)이며 어머니는 문소 김씨(聞韶 金氏)이다. 이태직(李泰稙)[1878~1913]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출신으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 진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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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의 후예이다. 이태학(李泰鶴)[1890~1962]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출신으로, 의성군 운산면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던 도중, 3월 초순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대구로 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도록 권유를 받고, 3월 7일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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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학술(李學述)[1892~1955]은 의성군 신평면 덕봉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25일 신평면 덕봉동에서 김수성(金守星)·손문원(孫文遠) 등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학술은 신평면 덕봉 교회의 집사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주변의 쌍계 교회·대사동 교회·괴산동 교회 등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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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흔이(李欣伊)[1879~1940]는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영수 이종출을 비롯한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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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재호(林在虎)[1898~1961]는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의성군 쌍계동의 박영화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을 듣고 동부동과 서부동의 김석근(金石根)·박홍섭(朴洪燮)·박후도(朴後度) 등의 청년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시위에 발맞추어 함께 궐기할 것을 다짐하고 먼저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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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내주(張來周)[1902~1928]는 의성군 단북면 이련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7월 30일 대구에 있는 금구(金龜) 여관에서 김한주(金漢柱)를 만나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우국(憂國) 선비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 정부와 각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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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성표(張星杓)[1924~1999]는 의성군 봉양면 신평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파견 일본군에 배속되어 있던 중,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 臨時 政府)와 광복군(光復軍)에 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1944년 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호북성(湖北省) 신점진(新店鎭)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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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주호(張柱虎)[1927~2006]는 의성군 비안면 외곡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8월 안동의 안동 농림 학교(安東 農林學校) 제8·9·10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 독립 회복 연구단(朝鮮 獨立 恢復 硏究團)의 단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국내로 보내는 단파 방송을 듣고 태평양 전쟁의 상황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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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응주(全應珠)[1895~1950]는 1919년 3월 17일 밤 강희석 등과 함께 석탑동 교회를 중심으로 한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창길(倉吉)·삼춘(三春)·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화령(花寧) 등 부근의 각동에서 운집한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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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갑이(鄭甲伊)[1879~1975]는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영수 이종출을 비롯한 교인들이 교회에 남아서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오후 7시경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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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부석(鄭富碩)[1885~1942]은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계획한 만세 시위에 찬성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동민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기도동(箕道洞)에서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를 벌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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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운수(鄭雲樹)[1903~1986]는 의성군 금성면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 6·10 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시위에 앞장섰다. 그후 미국에 유학하여 뉴저지주에 있는 장로교 종회 소속 프린스톤 대학 신학과에 들어가 1937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한국인 중심으로 애국 단체인 동지회, 교민회를 조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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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장수(鄭長壽)[1899~1953]는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계획한 만세 시위에 찬성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동민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기도동(箕道洞)에서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를 벌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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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흥록(丁興錄)[1881~1960]은 1919년 3월 19일 의성군 봉양면에서 이양준(李良俊) 등이 장날을 이용하여 도리원(桃李院) 장터에서 벌인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정흥록은 3월 19일 도리원 장터에서 볼 일을 모두 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 도리원 시위에 참가하여,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와 돌을 들고 도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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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경원(崔慶源)[1878~1965]은 의성군 조문면(召文面) 대리동(大里洞) 교회의 목사 박낙현(朴洛鉉) 등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최경원은 박낙현의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기로 하고, 의성읍 도동 교회[현 의성읍 교회]의 김천특(金千特)도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 최경원은 의성으로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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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모(崔達模)[1860~1932]는 전응주와 함께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후 창길(倉吉)·삼춘(三春)·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화령(花寧) 등 부근의 각동에서 운집한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고, 이튿날 밤에도 창길동에서 신월동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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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순권(崔順權)[1889~1961]은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계획한 만세 시위에 찬성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동민 1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기도동(箕道洞)에서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를 벌인 후 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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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금종(黃金鍾)[1871~1953]은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남승순(南勝淳)·남규우(南圭佑)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9일 남규우와 함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윤암동을 출발하여 사촌동으로 몰려갔다. 밤 9시 무렵, 사촌동 도로에는 부근 주민 500여 명이 모여 중앙 도로를 오르내리며 태극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