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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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點谷面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진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에 있는 집성촌.
[개설]
점곡면은 북쪽으로 경상북도 안동시와 인접하고 있어 씨족의 결속을 중시하는 안동 유교 문화권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의 대부분이 160~500m의 구릉성 산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미천의 지류를 따라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어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촌락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전통 촌락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인 의성 김씨, 안동 권씨, 안동 김씨 등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해주 오씨, 영양 남씨, 반남 박씨 등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형성과 변천]
의성 김씨는 황룡 1리에 집거하고 있다. 이 마을은 본래 평택 임씨들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1500년 경 김태가 입향한 이래 의성 김씨들이 세거해 오고 있다.
해주 오씨는 명고 1리 옥곡 마을에 세거하고 있다.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것은 경주 김씨였으나, 그 후 오강제가 입향하여 마을 이름을 옥곡이라 정하고 세거하였다고 전한다. 해주 오씨 갑신보(甲辰譜)에 의하면 의성과 안동 지역의 해주 오씨들은 12세 오일상(吳一尙)의 자손들이다.
영양 남씨는 윤암 2리에 세거한다. 이 마을은 윤곡 혹은 윤실, 윤이실이라고도 부른다. 의성을 비롯한 안동 일대의 영양 남씨는 안동의 입향조인 남휘주(南輝珠)의 아들 남민생(南敏生)의 자손들이다. 그중에서 남민생의 4남인 남우량의 차남 남치검의 자손들이 윤실의 남씨들이다. 1652년 남해준과 그의 아들 남몽뢰가 점곡면 일대의 월촌에 살다가 이 마을로 이주하였다고 전한다. 안동 일대의 남씨들은 남인 세력의 명문가로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안동 권씨는 윤암 3리에 세거한다. 자연 촌락 이름은 서암 혹은 각골이다. 1550년 경에 권성(權珹)이 이웃한 집성촌 사촌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그 자손들이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반남 박씨는 동변 2리 단애실과 동변 3리 월촌 마을에 세거한다. 단애실 마을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인 박윤함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1845년 경에 박윤함의 9대손인 박종량이 동생 박종익, 박종학과 함께 이곳으로 입향하였다고 한다. 월촌에도 반남 박씨가 집성을 이루는데 단애실보다 이른 시기인 1530년 경에 박항(朴恒)이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안동 김씨는 서변 2리와 사촌리에 세거한다. 사촌리의 안동 김씨는 고려 중기의 명장인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김자첨(金子瞻)이 안동의 회곡에 살다가 1392년에 아버지 김구정(金九鼎)과 함께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그 후손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촌리의 안동 김씨는 후에 안동 지방의 명문들과 혼인 관계를 통하여 명문 거족으로 성장하였고, 조선 말까지 대과 급제자 13명과 소과 급제자 31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안동 권씨와 풍산 유씨 역시 사촌리에 세거한다. 사촌리의 안동 김씨 입향조인 김자첨이 입향할 당시 사위인 안동 권씨 부정공파 권식이 함께 왔는데, 그 후손들이 사촌리에 살며 집성을 이룬 것이다. 풍산 유씨의 입향조는 겸암파인 유태춘이다. 유태춘은 조선 시대 안동 김씨 김종덕의 누이와 혼인한 뒤 동생인 유민춘과 함께 하회에서 처향인 사촌으로 이거하였다.
[현황]
점곡면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황룡 1리, 명고 1리, 윤암 2리, 윤암 3리, 동변 2리, 동변 3리, 서변 2리, 사촌 3리 등이 있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황룡 1리 황룡골은 『의성 군지』에 따르면 1998년 현재 약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 의성 김씨가 32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해주 오씨 집성촌인 명고 1리 옥곡 마을은 1998년 현재 총 46가구 중 해주 오씨가 20가구이다.
영양 남씨 집성촌인 윤암 2리는 1998년 현재 총 46가구 중 영양 남씨가 30가구이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계 남몽뢰를 배출한 마을로, 남몽뢰의 강학당인 이계당과 살림집인 서계당, 소계당 등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이 있다. 이 밖에도 남정기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사인 원동재가 있다.
안동 권씨 집성촌인 윤암 3리는 1998년 현재 주민 50가구 중 권씨가 26가구이다.
반남 박씨의 집성촌인 동변 2리는 1998년 현재 주민 70가구 중 박씨가 20여 가구를 차지한다. 이 마을에는 유학자 금파 박종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금파정이 있다. 반남 박씨의 또 다른 집성촌인 동변 3리는 1998년 현재 주민 71가구 중 26가구가 박씨이다. 이 마을에는 유학자이자 의병인 송고 박윤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송고정과 금헌 선생의 추모정인 금남정이 남아 있다.
안동 김씨의 집성촌인 서변 2리는 1998년 현재 주민 69가구 중 김씨가 41가구나 된다. 이 마을에는 김광수(金光粹)가 건립한 정자 영귀정(詠歸亭)과 김종덕(金宗德)이 창건하였으나 1896년 병신창의 때 불탄 유자정(孺子亭) 등의 유적지가 있어 안동 김씨 세거의 유래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유씨들이 함께 세거지하고 있는 사촌리에는 1998년 현재 안동 김씨 70가구와 안동 권씨 7가구, 풍산 유씨 10가구 등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안동 지역 명문의 세거지답게 많은 기념비적 유적이 남아 있다. 안동 김씨 문중의 기념물로는 김사원의 강학당인 만취당[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69호]과 위패를 모시고 춘추 향사를 지내는 후산정사를 비롯하여 양진당, 안동 김씨의 종택, 병암 서당 등이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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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9 | 단순오탈자 수정 | 함게 -> 함께 |
2014.03.03 | [형성과 변천] 수정 | <변경 전> 이 마을은 1350년에 김구정(金九鼎)이 마을을 개척하여 사촌(沙村)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인구 증가로 인해 사촌 일부를 분할하여 서변(西邊)으로 개칭하였다. ~안동의 희곡에 살다가 1392년에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그 후손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변경 후> 사촌리의 안동 김씨는 고려 중기의 명장인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김자첨(金子瞻)이 안동의 회곡에 살다가 1392년에 아버지 김구정과 함께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그 후손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2013.12.31 | [현황] 수정 | <변경 전> 임진왜란 때 불탄 유자정(孺子亭) 등의 유적지가 있어 <변경 후> 1896년 병신창의 때 불탄 유자정(孺子亭) 등의 유적지가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