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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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以樟 |
이칭/별칭 | 여장(汝章),만회헌(晩悔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 2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24년 - 박이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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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5년 - 박이장 무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87년 - 박이장 충무위 부호군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771년 - 박이장 사망 |
묘소|단소 | 박이장 묘소 -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
사당|배향지 | 만술재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양(咸陽) |
대표 관직 | 방어사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여장(汝章), 호는 만회헌(晩悔軒). 박광춘(朴光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혼천(朴混天)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종검(朴宗儉)이며, 어머니는 순천 장씨(順天 張氏)이고, 부인은 신지의(申之義)의 딸 아주 신씨(鵝洲 申氏)이다.
[활동 사항]
박이장(朴以樟)[1624~1711]은 1646년(인조 24) 향해(鄕解)[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나, 예위(禮圍)[회시(會試)]에는 낙방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했으나 또다시 낙방하자, 그동안 명리(名利)를 쫓는데 급급했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1665년(현종 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고 곧바로 비변사 낭청(備邊司 郎廳) 1669년 용양위 부사용(龍驤衛 副司勇)과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 1671년에는 경상 우병영 우후(慶尙 右兵營 虞侯)와 창원 도호부사(昌原 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창원 부사로 부임하자 고을 서당에 8조를 반포하고 교화에 힘썼다.
1674년 훈련원 부정(訓鍊院 副正), 함경도 북병영 우후(咸鏡道 北兵營 虞侯), 1676년(숙종 2) 공주 영장(公州 營將), 경원 도호부사(慶源 都護府使)를 거쳐 1681년 종성 도호부사(鍾城 都護府使), 1682년 중화 도호부사(中和 都護府使)를 지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남은 녹봉으로 대야제(大也堤)[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하리]를 축조하고, 1684년 청남 방어사(淸南 防禦使)가 되어 지역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1687년 평양 절제사(平壤 節制使)와 충무위 부호군(忠武衛 副護軍)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병환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로 향리에 머무르며 스스로 만회헌(晩悔軒)이라는 호를 짓고,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묘소]
무덤은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 박이장을 기리기 위한 만술재(晩述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