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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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正模 |
이칭/별칭 | 경해(景楷),이치재(二恥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91년 - 신정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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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19년 - 신정모 진사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19년 - 신정모 증광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신정모 경상도 군위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742년 - 신정모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64년 - 신정모 복관 |
출생지 | 신정모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 |
거주|이주지 | 신정모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
유허비 | 신정모 유허비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아주(鵝洲) |
대표 관직 | 거창 현감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경해(景楷), 호는 이치재(二恥齋). 신채(申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대석(申大錫)이고, 아버지는 신덕일(申德溢)이며, 어머니는 이성구(李星耈)의 딸 예안 이씨(禮安 李氏)이고, 부인은 안이순(安履順)의 딸 순흥 안씨(順興 安氏)이다. 숙부인 신덕순(申德洵)에게 출계하였다.
[활동 사항]
신정모(申正模)[1691~1742]는 어려서는 중부(仲父)인 신덕호(申德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이만부(李萬敷)에게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0년에 부정자, 1725년(영조 1)에 지평(持平)·정언(正言)·사옹원 주부(司饔院 主簿) 등에 임명되고, 1727년 병조 좌랑·강원 도사·병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거창 부사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 죄상을 과장하여, 1735년 다시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충청도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죽었다. 1864년(고종 1) 복관되었다.
[학문과 저술]
신정모는 귀양지에서 항상 나라와 부모에게 충효(忠孝)를 다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며, 그 호를 스스로 이치재(二恥齋)라 하였다. 문집으로는 6권 3책의 『이치재집(二恥齋集)』이 전하는데, 이 문집은 1899년(광무 3) 후손 신상헌(申相憲)과 신돈식(申敦植)이 편집·간행한 것이다. 저서로는 10권 3책의 『소행록(素行錄)』이 전해진다.
[묘소]
묘소는 오토산(五土山)[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오로리]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그의 유업을 기린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