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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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承 |
이칭/별칭 | 찬지(纘之),학천(鶴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20년 2월 12일 - 박승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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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35년 - 박승 이언적의 문하에서 수학 |
몰년 시기/일시 | 1577년 8월 2일 - 박승 사망 |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양지리[토현 마을]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 1리 |
수학|강학지 | 구고 서숙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 1리 |
묘소|단소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 1리[뒷산]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함양(咸陽) |
대표 관직|경력 | 처사(處士) |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찬지(纘之), 호는 학천(鶴川). 강계 판관(江界 判官) 박충무(朴冲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직(司直) 박유부(朴有阜)이고, 아버지는 참봉 박경신(朴景信)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 鄭氏) 감찰 정기(鄭琦)의 딸이다. 부인은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이세헌(李世憲)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승(朴承)[1520~1577]은 1526년(중종 21) 7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일찍부터 농업 방면에 관심과 재능이 있었다. 또한 천문, 지리, 의학, 산술(算術), 궁마(弓馬), 행진(行陣) 등 다방면에 걸쳐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이후 이언적(李彦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39년 20세 때 의성의 학미동(鶴尾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서숙(書塾)을 세운 42세 때까지 약 20여 년간 행적은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농장을 경영하여 재산을 축적하는데 힘쓰는 한편, 과거 시험에도 계속 응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561년(명종 16)에 집 맞은편에 구고 서숙(九臯 書塾)을 세우고 강학 활동을 하였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숙에 받아 들였으며, 숙약(塾約)인 「구고 서숙 입약 절목(九皐 書塾 立約 節目)」을 두어 학습과 관련되는 내용만이 아니라, 평소 향리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품행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박승이 거주하는 학미동의 동약(洞約)도 제정하여, 이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1563년(명종 18)에 『농가 요람(農家 要覽)』의 저술과 ‘정금조(正金租)’라는 신품종의 볍씨를 개발하여 보급시켰다. 이 같은 성과로 인해 암행어사의 천거로 1570년(선조 3) 후릉 참봉(厚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74년(선조 7)과 1576년의 흉년에 곡식을 받친 공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에 가자(加資)되었다.
[학문과 저술]
1947년에 권상규(權相圭)의 서문을 덧붙여 간행한 『학천 선생 유집(鶴川 先生 遺集)』이 있다. 문집 가운데 주목할 작품으로 사대부 자제라도 관직에 나아가기 힘든 사람은 스스로 농사에 힘써 자기가 먹을 것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함을 역설한 「구고 서숙 입약 절목(九皐 書塾 立約 節目)」이 있다. 또한, 자신이 제정한 동약(洞約)과 숙약(塾約) 등을 모아서 『약서 증산(約書 增刪)』, 농사법과 모종을 연구한 『농가 요람(農家 要覽)』 등을 지었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가족과 친지간에 지켜야할 예의와 의례에 관한 『육행 신편(六行 新篇)』, 국정 운영과 관련한 『정책 찬요(政策 纂要)』 등을 지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학미산(鶴嵋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