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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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宜泰 |
이칭/별칭 | 근인당(近仁堂),대래(大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701년 - 이의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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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26년 - 이의태 이세달의 양자로 입적 |
몰년 시기/일시 | 1779년 - 이의태 사망 |
출생지 | 이의태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
거주|이주지 | 이의태 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양지 2리 근인당 |
묘소|단소 | 이의태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 주월산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성(眞城) |
대표 관직|경력 | 훈도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대래(大來), 호는 근인당(近仁堂). 이이식(李爾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담(李曇)이고, 아버지는 이세달(李世達)이고, 어머니는 남두욱(南斗煜)의 딸 영양 남씨(英陽 南氏)이고, 부인은 신천걸(申天杰)의 딸 아주 신씨(鵝洲 申氏)이다. 생부(生父)는 이기징(李箕徵)이다.
[활동 사항]
이의태(李宜泰)[1701~1779]은 성리학에 뜻을 두어서 언제나 겸허하여 구차스레 남다른 면을 보이지 않았으나, 옳다고 인정되는 것에는 자기 소신대로 끝까지 지켜나갔다. 1726년(영조 2)에 이세달이 죽고 이세달의 부인 영양 남씨의 슬하에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게 되었다. 양모인 영양 남씨를 모시기를 친부모처럼 정성을 다해 모셨다.
1733년(영조 9)에 의성현의 동쪽 구눌촌(求訥村)[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으로 이거하여 근인당(近仁堂)을 짓고 강학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의성 향교 훈도에 취임하여 선현들의 학규(學規)를 모아서 여러 교생들을 가르치고, 「권과절목(勸課節目)」을 새로 만들어 의성군 내에 시행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려서 신천걸(申天杰)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으며, 이수태(李秀泰), 신도삼(申道三), 임필대(任必大), 이상정(李象靖), 신효원(申孝源), 신상권(申尙權), 이행원(李行遠)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저술]
어려서 신천걸(申天杰)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1823년(순조 23) 족질 이야순(李野淳)의 편집을 거쳐, 족손 이덕강(李德綱)이 『근인당 문집(近仁堂 文集)』 4권 4책을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야순의 서문과 권말에 이병원(李秉遠)의 발문이 있다. 잡저의 「권과절목」은 후진 양성에 관심을 둔 이의태가 횡당(黌堂)의 수석 책임을 맡고 그 절목을 작성한 것으로, 10개 항목을 작성하고 각 항목마다 세칙과 해설을 소상하게 밝혔다. 이는 17세기 향학(鄕學)의 교육 방침으로서 교육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의 주월사가 있는 주월산 기슭에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