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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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譓 |
이칭/별칭 | 지중(智中),도해와(蹈海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출생 시기/일시 | 1606년 - 구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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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병자호란 이전 - 具譓 학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除授) |
몰년 시기/일시 | 1666년 - 구혜 사망 |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
활동지 | 은거지: 의성군 가음면 순호동 선영 하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몽교관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지중(智中), 호는 도해와(蹈海窩).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의 후예이며, 진사 구사종(具嗣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구연(具淵)이며, 아버지는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 구광정(具光廷)이고, 어버니는 참봉 정찬(丁瓚)의 딸인 의성 정씨(義城 丁氏)이다. 부인은 참봉 이언각(李彦覺)의 딸이다.
[활동 사항]
구혜(具譓)[1606~1666]는 인조 때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에는 어가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홍우정(洪宇定), 김시온(金是榲) 등과 뜻을 같이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난 이후에는 홍우정과 함께 영남으로 돌아가서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갔다. 조정에서 그 의기를 가상히 여겨 6품직인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 선영 아래 도해와(蹈海窩)를 지어 자호(自號)로 삼고 은거하였다. 종신토록 갓을 쓰지 않고, 빗질도 하지 않았으며, 북쪽을 향해 앉지도 않는 등 절의를 지켜 세칭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존경 받았다. 구혜는 특히 문절공의 충절의 얼을 기렸는데 자손에게 “자손 대대로 문절공 할아버지의 충효 정신을 잊지 말라.”는 가훈을 남겨 후손들이 그 뜻을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에 그 후손들이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도해와(蹈海窩)가 있으며,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송은 구홍을 주벽으로 한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구혜의 죽음을 기려 묘갈명(墓碣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