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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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成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구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김성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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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6일 - 김성수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서부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65년 - 김성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0년 - 김성수 대통령 표창 추서 |
거주|이주지 | 김성수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비안면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 주도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활동 사항]
김성수(金成守)[1890~1965]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비안면 동부동·서부동 주민들에 의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의성군에서 벌어진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는 3월 12일 비안면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쌍계동의 만세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부동에 사는 김석근은 같은 마을의 임재호·박홍섭과 서부동의 박후도를 자기 집으로 불러 시위를 모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13일 밤 서부동 우시장으로 가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3일 밤 서부동 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검거를 피한 임재호·박후도·박홍섭 등은 동부동의 김성수·손동일과 모의하여 주도 세력으로 끌어들여 16일 재차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성수는 비안면의 시위 운동에 참여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