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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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淵伯 |
이칭/별칭 | 암재(巖齋),응구(應九),박연백(朴淵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구 |
[정의]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밀양.
[활동 사항]
박연백(朴淵伯)[1869~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박연백(朴淵白)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의 의병 항쟁사 중·후기에 속하는 시기에 의성 의진을 이끈 인물이다.
박연백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공산(孔山)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죽창이나 나무 막대기 등으로 신무기에 대항하여 적 십 수 명을 도륙한 뒤 기세를 올려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靑松)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 기습과 화공전을 펼쳐 일본군을 공략하였다.
박연백은 1907년 10월 산남 의진의 창의장 정용기와 합세하여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서 일본군과 격돌한 입암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를 비롯한 핵심 부장과 다수 의병이 사망하여 박연백이 이끈 의성 의진은 다시 의성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박연백은 수하에 김반석·김학이·이신산 등을 거느리고 1907년 12월 19일 의성군 금곡면 노매동, 청송군 화목면 소근리, 의성군 춘산면 등지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접전을 벌였다. 1908년 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사무소와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경상북도 청송군 소정리(所井里)에서 교전하였으며 또한 25일에 의성군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였다.
이처럼 박연백은 소규모 부대를 거느리고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후 일본군의 대거 증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항쟁이 곤란함을 느껴, 1909년 11월 20일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