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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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忠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구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충한(金忠漢)[1883~196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출신으로, 김천 황금동 교회 조사였다. 3월 9일 김천에 있는 황금동 교회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알고 지내던 김원휘,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김천으로 온 계성 학교 학생 김수길, 황금동 교회의 원로인 최용수, 교회 조수 한명수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김충한은 태극기와 경고문을 제작하여 김천 장날인 3월 11일 오후 3시에 살포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모의 도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황금동 교회에 모인 주동 인물 네 명을 비롯하여 모두 일곱 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