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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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勝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영양.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예이다.
[활동 사항]
남승순(南勝淳)[1857~192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 사촌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장남 남규우(南圭佑)·황금종(黃金鍾)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의성군 점곡면의 독립 만세 시위는 3월 16일 안평면 석탑동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점곡면 송내동 교회 권수백(權秀伯) 조사가 주도했다. 남승순은 62세의 고령이었으나 사촌동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장남 남규우로 하여금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종용하여 이날 오후 5시 황금종과 함께 윤암동의 주민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여 이에 찬동한 23명이 모였다. 아들 남규우는 시위 군중과 함께 윤암동을 출발하여 사촌동으로 몰려갔다. 밤 9시 무렵, 사촌동 도로에는 사촌동·서변동·동변동·윤암동·송내동 등 부근 주민 500여 명이 모여 중앙 도로를 오르내리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점곡 주재소로 몰려가 주위를 돌며 밤새도록 시위를 벌였다. 만세 시위는 다음날 20일 새벽 1시까지 전개되었는데, 일본 경찰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자 시위 주도자들이 검거되기 시작하였다. 경찰의 검거에도 불구하고 김유경이 주도한 시위대는 20일 밤 10시 다시 만세를 불렀다. 점곡면 독립 만세 운동에서 검거된 사람은 모두 21명이었다.
1919년 7월 5일 대구 지방 법원 의성 지청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8월 13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9년에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