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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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洛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낙현(朴洛鉉)[1887~1957]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의성읍 장날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낙현은 조문면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대구 성경 학당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갔다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과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박낙현은 3월 12일과 13일 교회의 집사 윤용구(尹龍九)와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과 함께 만세 시위의 구체적인 실행 방도를 모의하였다.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제의하여 찬성을 얻고, 윤용구·윤영주·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대한국 독립 만세’라고 쓴 작은 기(旗) 수십 개를 만들었다. 이들은 같은 교회의 김군석(金郡石)·김자룡(金子龍)·신진수(申震洙) 등과 의성읍 도동 교회[현 의성읍 교회]의 김천특(金千特), 안평면 석탑 교회의 최경원(崔慶源)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았다. 그리고 의성 공립 보통학교 출신인 윤영주는 만세 시위에 학생들을 동원시키기로 하고, 후배 정의진(鄭義鎭)·김덕암(金德岩)·구남술(具南述) 등과 모의하여 학교 인근 도동동(道東洞) 공자묘 뒷산에 모이게 한 후, 시장 쪽으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일본 경찰은 조문면·의성면·안평면 등지의 예수교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 운동이 벌어진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3월 18일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오후 1시경 의성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와 도동동(道東洞) 공자묘 뒷산으로 모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시장을 폐쇄시키고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공자묘 뒷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장에서 용의자 15명을 예비 검속하고, 나아가 1시 30분경 시장을 폐쇄해 버렸다.
박낙현은 오후 2시경 윤용구·윤영주·오상룡 등 주동 인물들과 함께 두루마기 속에 태극기를 감추고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흩어지고, 박낙현은 윤영주를 포함한 9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박낙현은 1919년 4월 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고, 4월 2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5월 22일 고등 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