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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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進文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오진문(吳進文)[1896~195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출신으로, 1919년 8월부터 대구에서 오기수(吳麒洙) 등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폭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1920년 1월 의성 출신 오기수와 김영우 등과 함께 조선규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740원을 제공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고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 입수에 힘쓰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0년 7월 24일 소위 제령 위반 및 총포 화약 취체령 위반으로 기소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3년 4월 10일 오기수 등과 함께 의성에서 북풍회(北風會)와 연결된 사회 운동 단체인 정의사(正義社)를 조직하고 집행 위원을 역임하였다. 1927년경 의성 청년 동맹(義城靑年同盟)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8년 6월 대구 달성 공원(達城公園)에서 노차용(盧且用)·곽동영(郭東英)·이강희(李康熙)·문상직(文相直)·유상묵(柳尙默)·장택원(張澤遠)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 ㄱ당(黨)을 결성하였다. ㄱ당은 중국 광동(廣東)의 군관 학교(軍官學校)에 청년들을 유학시키고, 만주 방면에 미간지를 개간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실현한다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대구와 달성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진문은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7월 24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8년에는 의성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