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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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龍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윤용구(尹龍九)[1891~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의성읍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3일 대리동 교회 목사 박낙현과,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과 함께 의성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고 박낙현·윤영주·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대한국 독립 만세’라고 쓴 작은 기(旗)를 수십 개를 만들었다. 그는 3월 18일 오후 3시경 주동 인물들과 함께 두루마기 속에 태극기를 감추고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만세 시위의 정보를 알고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치다가 시장에서 용의자 15명을 예비 검속하고, 시장을 폐쇄해 버렸다. 이때 윤용구를 비롯한 9명이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윤용구는 1919년 4월 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 받았고, 4월 2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5월 22일 고등 법원에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윤용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