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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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北述 |
이칭/별칭 | 이화실(李華實)·호출(浩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전주.
[활동 사항]
이북술(李北述)[1887~1970]은 이화실(李華實)·이호출(李浩出)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 김옥돈(金玉頓)·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대사동의 주민 이만준(李萬俊)·배세태(裵世泰)·이맹준(李孟俊)·이수원(李守元)·정갑이(鄭甲伊)·이흔이(李欣伊) 등에게 이 계획을 알려 찬성을 얻었다. 그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3월 16일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행진을 전개하였다.
또 3월 17일에도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 등지를 돌면 만세 시위를 벌였고, 나아가 창길동의 안평 주재소에 앞에 당도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인 후,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3월 18일 밤에도 전날보다 더 많은 300여 명의 군중들과 더불어 대사동 우리곡에서 만세를 부른 후 다시 안평면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을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들은 창길동에 있는 안평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일본인 순사 부장과 한인 순사 및 군청 직원 등을 제압한 뒤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이에 의성 경찰서는 순사 부장 이하 2명을 보내 안평 주재소 순사와 함께 시위 주동자의 체포에 나선 결과 12명이 체포되었다.
이북술은 체포된 후 7월 14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