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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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良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양준(李良俊)[1890~1921]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대사동 교회의 이종출은 3월 12일 비안면 쌍계 교회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양준은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낮 예배를 마친 뒤, 이종출을 비롯하여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 등과 교회에 남아 만세 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대사동의 주민 이만준(李萬俊)·배세태(裵世泰) 등에게 이 계획을 알렸다. 그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튿날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행진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7일에도 오후 8시경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창길동의 안평 주재소에 앞에 당도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은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까지 만세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였다.
3월 18일 밤 전날보다 더 많은 300여 명의 군중들과 더불어 대사동 우리곡에서 만세를 부른 후 다시 안평면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을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들은 창길동에 있는 안평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일본인 순사 부장과 한인 순사 및 군청 직원 등을 제압한 뒤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3월 19일 도리원 장날을 기해 장터에서 시위를 벌이고 의성경찰서로 행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4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안평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벌인 뒤 박곡동·석탑동·신월동을 거쳐 불어난 시위 군중 700여 명과 함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나아갔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의성 경찰서는 비안 주재소에 출장 중이던 군경을 도리원 주재소로 급파하여 도리원 장이 열릴 무렵 이를 폐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취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에도 불구하고 1,000여 명의 시위대는 몽둥이와 돌을 들고 도리 주재소로 몰려가 포위하여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때 군경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는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3년을 언도 받고, 동년 9월 23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상처가 악화되어 가출옥하였으나, 곧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