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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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泰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2월 12일 - 이태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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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이태학 평양 신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이태학 대구 서문 시장 독립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8일 - 이태학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 받고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62년 3월 27일 - 이태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이태학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
거주|이주지 |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
학교|수학지 | 평양신학교 - 평양 |
활동지 |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구 서문시장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영천.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의 후예이다.
[활동 사항]
이태학(李泰鶴)[1890~1962]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출신으로, 의성군 운산면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던 도중, 3월 초순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대구로 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도록 권유를 받고, 3월 7일 대구에 도착하여 남산정에 있는 대구 성경 학교 강습생들에게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도록 자각심을 고취하고,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운동의 상황을 알렸다.
이태학은 3월 8일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 200여 명이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장터로 모여들자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태학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