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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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雲樹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5월 27일 - 정운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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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정운수 6·10 만세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5월 - 정부석 대한민국 임시 정부 광복군 OSS 훈련 신병교육 담당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17일 - 정운수 광복군 정진대로 파견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정윤수 건국 포장 추서 |
몰년 시기/일시 | 1986년 11월 6일 - 정운수 사망 |
출생지 | 정운수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학교|수학지 | 연희 전문학교 - 서울 |
학교|수학지 | 프린스톤 대학 신학과 - 미국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복군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운수(鄭雲樹)[1903~1986]는 의성군 금성면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 6·10 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시위에 앞장섰다. 그후 미국에 유학하여 뉴저지주에 있는 장로교 종회 소속 프린스톤 대학 신학과에 들어가 1937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수학하는 동안 한국인 중심으로 애국 단체인 동지회, 교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 신문인 『신한 민보(新韓 民報)』에 1942년 3·1절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개최된 전한인 대회(全韓人大會)의 진행 사항을 기고하여 미국인들과 항일 의식의 공감대를 조성하였다.
1942년 3월말부터는 워싱턴에서 구미 위원부(歐美 委員部) 이승만(李承晩)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정운수는 『구미 위원 주보(歐美 委員 週報)』의 편집 발송을 담당하여 임병직·장기영 등과 같이 근무하였다. 1943년 6월 뜻한 바 있어 미국 공군 사관학교[O.C.S] 등에서 훈련을 받고, 1944년 정월에 공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4년 5월 C.B.I[중국·버마·인도] 전투구 항공대에 배속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5년 1월 중국 곤명(昆明)에 도착하여 미 제14항공대 소속 특수 중폭격기 대대에 근무하던 중 중경에 있는 한국 임시 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한미 합작 군사 훈련을 위한 한국 측 잠재 세력을 조사 보고하라는 미 육군성 지시를 받았다. 정운수는 한국 임시 정부 요인과 긴밀한 상의 끝에 양자강 건너 광복군 제1지대와 서안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를 각각 방문하고 정확한 실태를 조사하였다.
1945년 5월초에 서안에는 광복군 제2지대의 본부 지대장 이범석과 안춘생(安椿生)·노태준(盧泰俊) 등이 부서를 맡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정운수는 국방성으로부터 미국 O·S·S[전략정보처] 산하에 한미 합작 유격대(韓美 合作 遊擊隊)를 조직하여 훈련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이순용(李淳鎔)과 함께 주로 통신 교육을 전담하였다. 1945년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광복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정운수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