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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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多仁聖堂 |
이칭/별칭 | 천주교 다인 성당,천주교 안동 교구 다인 성당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서릉3길 11-5[서릉2리 171-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창환 |
설립 시기/일시 | 1957년 - 다인 공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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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61년 5월 25일 - 다인 성당 설립 |
현 소재지 | 다인 성당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서릉2리 171-1 |
성격 | 성당 |
전화 | 054-861-8343 |
홈페이지 | 다인 성당(http://cafe.daum.net/dain1004)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서릉리에 있는 천주교 안동교구 소속 성당.
[개설]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에 이웃하는 안사면 쌍호리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공소가 있었기 때문에 다인면의 전교는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다인면에서의 실제적인 복음 전파는 1948년 상주의 다래 공소 출신인 김시종이 의성 지역으로 이사해 오고, 1952년 경상북도 예천에 살던 그의 누이 김옥순이 다인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시작되어 이들에 의해 강말림과 권태선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다인의 전교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국제 가톨릭 구제회(NCWC)의 구호품이었다. 경상북도 상주의 퇴강 성당에서 소달구지로 밀가루와 옥수수를 실어와 나누어주자 신자가 갑자기 3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렇게 되자 1957년 퇴강 본당에서 다인 공소를 설립하고, 이대일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계속 불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8년에는 양조장을 하던 건물을 매입하여 침례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의성 지역에서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대구 교구청에서는 서부 지역의 중심인 안계 본당을 설립하고 김규태 신부를 발령했다. 그러나 안계 공소는 너무나 허술하여 본당 신부가 거처할 수 없어 임시로 다인에 머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인의 교우들은 본당을 유치하기 위해 대구 교구청을 찾아가 그 타당성을 설명하는 한편, 본당의 부지를 확보하고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성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61년에 다인 성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변천]
다인 성당은 다인면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면사무소 바로 뒤편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다인 성당 자리는 공동묘지였으나 성당이 지어져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면서 이제 다인의 애환이 깃든 곳이 되었다.
본당 유치를 위해 대구 교구청을 찾아 그 타당성을 설명할 때부터 성당의 부지를 물색하다가 1962년에 부지 매입을 완료하고 이듬해인 1963년에 본당 건물과 사제관, 그리고 식당을 지었다. 이후 다인 성당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본연의 임무인 복음의 전파에 전념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열기와 함께 다인 성당도 지역의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본당 9대 신부로 부임한 류강하는 피폐한 농촌의 생활 환경과 정부의 반농민적인 정책을 인식하고 농민 사목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에는 1,500명이 참석한 본당의 추수 감사제 및 경상북도 농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경상북도 농민 대회에서 어려운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고, 농민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을 표출하는 시위를 가졌다. 1985년에는 불법 선거를 고발하고, 본당의 영농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85년 7월 12일에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소 값 폭락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몰이 시위’를 벌이고, 12월 8일에는 농지 개량 조합의 조합비를 현물로 납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저항하자 신자들에게 은밀한 압력이 들어왔다. 본당 사목 회장 김학진의 약국이 영업 정지[1986년 1월 19일] 되고, 본당에 다니는 중·고등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신앙을 침해당하는 사건[1986년 7월 9일]이 있었고, 양담배 및 농축산물의 수입을 강요하는 미국에 대해 항의 행군을 한 본당의 농민 회원들이 안동 경찰서에 연행되는 사건[1986년 9월 3일]이 있었다. 이처럼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위협을 가하는 정부에 대해 천주교 안동 교구 정의 평화 위원회에서는 “너희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라는 성명서를, 그리고 학부모들 또한 “어린 십자가를 짊어지고”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저항했다.
이러한 투쟁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1991년에는 본당에서 의성 지구 사목회 주관의 ‘공안 통치 종식 및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시가지에서 평화의 촛불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 외부를 향한 격렬한 투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당의 내실을 다지는 일 또한 하나하나 이루어나갔다. 본당 소속의 신락 공소가 1984년 12월 18일에 신축되고, 새로운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 1985년 5월 26일에 구 성당을 철거하고, 1986년 4월 1일 본당 설립 25주년 기념식과 함께 새 성전을 완공한 봉헌식이 있었고, 1992년 7월 17일 풍양 공소를 신축하였다.
격동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사목의 방향도 변화를 맞게 되었다. 농민 운동은 농민 살리기 운동, 우리 농산물 직거래를 통한 생산자와 소비자 보호 운동, 유기 농법을 통한 무공해 농산물과 같은 우리 삶을 밝게 하는 운동으로 변모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1994년의 ‘우리 농산’이었다. 그리고 본당 내부적으로는 1998년 성모 어린이집을 준공하고, 1999년 문화원을 신축하고, 2011년 『실록 다인 본당 50년』을 발간하는 등 본당의 내실을 다지는 일들을 해오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다인 성당은 다인면을 중심으로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미사를 보며, 꾸리아·기도회·연령회·성모회·안나회·울뜨레아·부부 일치·성심회·벨라도회 복지부 등의 단체를 통해 신심을 다지고 지역에 대한 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황]
본당은 현재 신부 1명, 수녀 3명이 재임중이며, 그리고 교적상 총 신도수는 990명이다. 본당의 교육 기관으로는 주일 학교와 성모 어린이집이 있고, 산하에는 신산 공소, 신락 공소, 상광 공소, 곤대 공소가 있다.
[의의와 평가]
다인 성당은 그 역사를 보면 항상 지역 주민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이들의 편에 서서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성당의 존재 목적이 복음의 전파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기 때문이다. 이에 다인 성당은 지역 주민의 삶과 함께하고, 지역 주민을 위한 성당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